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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재발견
중국 서안 여행기 - 측천무후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 돼
기사입력: 2008/04/11 [13:28]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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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 편집이사



▲  측천무후는 죽은 후 고종과 함께 건능에 합창되었는데 이 능은 서안에서 버스로 두 시간 거리에 있다.
“ 백제와 고구려 멸망은 모두 고종 재임기간에 이루어졌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백제가 망한 것이 660년이고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 된 것이 668년으로 8년의 간극이 있다. 이 8년 동안 신라는 왕이 무열왕에서 문무왕으로 교체된다. 즉 신라는 백제를 멸망 시킨 후 곧 무열왕이 돌아가 문무왕이 등극하게 된다. 무열왕은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해 인 661년 6월 재임 7년만에 죽었다. 그러나 당은 고종이 무려 34년간 재임하기 때문에 황제 교체 없이 한반도의 이런 역사를 지켜보게 된다.”




3대 고종은 우리와 깊은 관계를 가졌던 황제다.

당을 세운 인물은 고조다. 그러나 고조는 전국에서 일어나는 할거 세력을 소멸시키고 국가 통일을 하느라고 제대로 황제의 역할을  못한 채 626년 이세민이 일으킨 정무의 난을 계기로 황제 자리를 태종에게 내어주었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를 누렸던 당을 건립했던 고조 이연은 겨우 8년 동안 황제로 있다가 70세로 서거했다.

고조 후 황제가 된 인물이 이세민이다. 그가 황제가 된 것은 흡사 조선 시대 형제들을 죽이고 수양대군이 왕이 되었던 것과 비슷하다. 이세민은 626년 ‘정무의 난’을 일으켜 태자 이건성과 동생 이원길을 주살하고 아버지 고조를 협박해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 그는 권력을 장악한 후 다행히 사회를 안정시키고 생산력을 발전시켜 당이 번창할 수 있는 터전을 닦았다. 그는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협박하는 등 불법으로 황제 자리를 차지했지만 나중에 정치를 잘 해 칭찬을 받았다. 후손들은 그를 군사전략가인 동시에 개명했던 인물로 평가, 걸출한 정치가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52세로 죽었는데 비교적 일찍 황제 자리에 올라 23년간 재위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3대 황제가 된 인물이 고종 이치다. 그는  태종의 아홉 번째 아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를 위치는 아니었다. 고종은 황제가 되기 전부터 몸이 약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는 황제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는데 역으로 이런 단점이 귀족들의 눈에 들어 황제로 추대되었다.

아버지 태종은 강력한 황권을 휘둘러 귀족들은 항상 이것이 불만이었다. 태종은 황후 소생으로 3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첫째는 동성애를 하는 것이 발각되어 태자 자리에 오르지 못했고 태종을 닮아 대단히 영명하고 유능했던 둘째는 야망이 너무 강하다고 해 귀족들의 경계로  역시 황제가 되지 못했다.

귀족들은 이들 대신 황제가 된 후 자신들의 말을 잘 들어 줄 고종이 황제가 되기를 원해 결국 어릴 때부터 간질병을 가져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고종이 황제가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은 모두 고종 재임기간에 이루어졌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백제가 망한 것이 660년이고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 된 것이 668년으로 8년의 간극이 있다. 이 8년 동안 신라는 왕이 무열왕에서 문무왕으로 교체된다. 즉 신라는 백제를 멸망 시킨 후 곧 무열왕이 돌아가 문무왕이 등극하게 된다. 무열왕은 백제를 멸망시킨 다음해 인 661년 6월 재임 7년만에 죽었다. 그러나 당은 고종이 무려 34년간 재임하기 때문에 황제 교체 없이 한반도의 이런 역사를 지켜보게 된다.

재임기간 동안 신라와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고종은 대장군 소정방을 앞세워 서돌궐을 공격하는 등 국토를 확장시켰던 인물이다.

그는 또 자신이 재임하는 동안 측천무후를 받아들여 황후로 삼아 나중에 측천무후가 그를 이어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황제가 되도록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측천무후가 황제가 된 과정은 파란만장하다. 그의 아버지 무조는 고조가 ‘정무의 난’을 일으킬 때 함께 참여했던 지방의 목재상에 불과했지만 딸 측천무후는 뛰어난 미모로 14살 때 궁에 들어가 궁녀 생활을 했다. 그는 이처럼 명문 출신이 아니었지만 타고난 미모와 영명한 머리로 곧 태종의 사랑을 받아 시중을 들게 되었다.

이 때 태종의 아들 고종도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는데 아버지가 태종이 돌아가자 법도에 따라 그를 한동안 비구니 생활을 하도록 한 후 궁중에 다시 불러들여 총애했다. 궁중에 들어 온 후 고종의 사랑을 받아 숙의가 되었던 그는 왕후를 차례로 누명을 씌워 살해 한 후 결국 황후가 되었다. 그는 황후가 되기 위해 어린자식마저 죽이는 잔인함을 보였다. 이런 힘든 과정을 통해 그가 황후가 된 것이 32살 때였다.   

측천무후는 황후가 된 후 간질병 때문에 정사에 소홀했던 고종을 대신해 정치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이 때 뛰어난 정치력을 보여 신하들을 놀라게 했다. 이렇게 되자 그는 형식적인 황제 고종을 대신 조정의 실력자가 되었는데 그는 자신이 명문가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문벌을 앞세우는 귀족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권력을 쥔 후 과거 출신의 신진세력들을 대거 관리로 등용해 이들에게 정사를 맡김으로 처음에는 구 귀족들의 경계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신진세력을 키움으로 황제권을 강화, 국가의 기강을 튼튼히 해 국력을 신장시켰다.

황후가 되기 위해 피도 마르지 않았던 자식을 죽이기도 했던 그는 나중에는 황제가 되기 위해 자신이 낳았던 두 명의 황제를 자신의 손으로 권좌에서 물러나도록 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황제가 되기 전 아들 중중과 예종을 황제의 자리에 올렸지만 무능을 이유로  퇴위시켰고 결국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그의 야심을 안 남편 고종이 그를 폐출 시켜려 했지만 이때는 시기적으로 이미 늦어 권신들마저 어쩔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중국 황제 중 가장 나이가 많아 황제가 된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는 67세로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당시는 60세까지 살았던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황제가 되었어도 많은 권신들이 그가 빨리 물러날 것을 원했지만 이에 아랑하지 않고 뛰어난 정치력으로 82살이 되어 죽은 후 물러났다.        

 그는 재임 동안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 시켜 위세를 떨쳤다. 특히 그는 오랫동안 중국의 역대 황제들이 꿈꾸어 왔으나 실천에 옮기지 못했던 고구려를 정벌해 당의 위세를 대외적으로 과시했다.

오늘날 장안을 찾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당의 번창했던 문화에 놀라움을 가지면서도 쓸쓸한 마음으로 당의 수도를 둘러보아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황제가 된 후 나라 이름마저 ‘주’로 교체 하고 아들 예종은 자신의 성 무씨가 되도록 하는 등 당시 세계에서는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여권신장을 위해 노력했던 그도 나이는 어쩔 수 없었는지 그의 나이 82세가 되었을 때 신하들이 그를 협박해 중종을 다시 복위시킴으로 당 왕조 역시 복원되었다.

그러나 이런 그의 행동은 나중 여인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중종의 황후 위 씨도 황제가 되려는 야망을 갖고 이를 실천하다가 제명에 살지 못하고 죽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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