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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재발견
신라 혜초스님 서역 여행 후 ‘왕오천축국전’ 남겨
기사입력: 2008/04/25 [09:39]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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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 편집이사
 



『그의 저서 왕오천축국전은 일본과 중국, 우리나라 학자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소개가 되었으나 1938년 독일의 발터 폭스에 의해 처음으로 왕오천축국전의 전문이 독일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그의 전기가 밝혀진 것도 이를 통해서다. 이에 따르면 혜초는 마르코 폴로보다 500여년 앞서 인도․아프가니스탄․동로마제국․러시아를 둘러본 것이 된다』







혜초가 살았던 시대는 신라 35대 경덕왕이 석굴암과 불국사를 창건하는 등 신라 문화가 전성기를 누릴 때였다.

이때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있는 신라인들이 많았는데 이들 중에는 명성을 떨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스님들 중에는 구법을 위해 당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많았다. 혜초․원측․무상․현초․의림․균량이 이들이다.

이들 중 혜초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1908년 프랑스 학자 페리오가 돈황 막고굴에서 그의 저서 ‘왕초천축국전’을 발견하면서다. 돈황에는 당나라 석굴사만 해도 230여개가 있다. 이들 석굴사에 혜초가 인도 구법 여행을 하면서 서역의 사회상을 자세히 적어 놓은 저서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00년경 석굴사에 왕원록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동굴안의 조그만 밀실을 발견했는데 그 속에는 고문서와 불경, 불화가 가득 차 있었다. 왕초천축국전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다음해 프랑스 페리오가 이곳에 와 왕오천축국전을 포함해 5천 여 점에 이르는 미술품을 가져갔는데 이것이 세상에 혜초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혜초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다. 그가 나중에 쓴 시를 볼 때 당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 태어났고 그 시점도 신라 문화가 최 융성기를 누렸던 경덕왕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혜초가 몇 살 때 어떤 과정을 통해 당나라에 가게 되었는지 역시 정확히 알 수 없다.

단기 그가 어렸을 때 꿈을 꾸었는데 이 꿈이 이상해 불승이 되기를 결심했고 불승이 된 후 공부를 더하기 위해 당나라로 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에 머무는 동안 그는 삼외삼장(三畏三藏)을 만나 불교를 가르쳐 줄 것을 간청했지만 처음에는 거절을 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만 해도 중국 승려들은 신라 승려들을 우습게보았던 것을 생각하면 혜초가 삼외삼장을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혜초는 이적을 통해 그의 불심을 보여주어 마침내 삼외삼장의 제자가 될 수 있었다.

당나라에서 불교의 진리를 터득한 혜초가 오천축국의 순례에 오른 것은 723~729년으로 7년 동안이다. 배를 타고 동남아를 거쳐 725년 인도에 도착했던 그는 다시 서북인도와  중앙아시아를 순방한 후 729년에 당으로 돌아왔다.   

 이 때 불공금강지(不空金剛智)가 그를 크게 환영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후 서안에 머물련서 그와 함께 공부를 했다. 740년 그는 천복사에 머물면서 금강지와 함께 밀교를 연구했다.

이후 그는 인도에서 가져 온 불경들을 번역하면서 세월을 보내게 되는데 번역을 하는 도중 금강지가 죽어 실망이 컸다. 그는 이 후 금강지의 제자였던 불공삼장과 함께 계속 서안에 머물면서 밀교를 연구했다. 774년 불공삼장 마저 죽자 혜초는 밀료의 가장 원로로 성직에임명되어 오로지 밀교에 몸을 바쳤다. 이후 6년 뒤인 780년 우타이산 건원보리사에 들어가 번역사업에 전력을 쏟다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 그의 나이는 80살이 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저서 왕오천축국전은 일본과 중국, 우리나라 학자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소개가 되었으나 1938년 독일의 발터 폭스에 의해 처음으로 왕오천축국전의 전문이 독일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그의 전기가 밝혀진 것도 이를 통해서다. 이에 따르면 혜초는 마르코 폴로보다 500여년 앞서 인도․아프가니스탄․동로마제국․러시아를 둘러본 것이 된다.

서역 불교를 중국에 알린 현장법사는 7세기 경 중앙아시아를 둘러 본 후 ‘대당서역기’를 썼다. 그러나 혜초는 중앙아시아는 물론이고 서북인도까지 둘러보았으니 순례의 길이 더욱 넓었고 그 만큼 기록도 풍성하다.

물론 역사학자들 중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 보다 내용면에서  세밀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 책이야 말로 혜초 개인의 기록이 아닌 8세기 경 인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역사와 풍속 그리고  종교 심지어는 정치체제 등을 알려주는 귀중한 세계 문화유산이다.

혜초가 구법을 위해 신라를 떠나 중국으로 또 중국에서 인도로 들어간 것이 1천 300여 년 전이다. 그가 살았을 때 활동을 했던 서안도 많이 변했지만 그가 서안에 머물면서 밀교 연구를 했던 천복사는 아직 그대로 있어 여행객들의 눈길을 끈다.

천복사는 시내 중심부에 있다. 지금은 공원이 된 이 절터에는 소안탑이 있다. 이 탑은 707년  승려 의정이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과 경전 번역본을 보관하기 위해 세웠다. 탑은 당초 15층으로 높이가 45m였으나 지진으로 위쪽 두층이 파괴되었다.

이 탑 기단석에는 흥미로운 얘기가 전해 온다. 1487년 서안에 지진이 발생했는데 그 때 이탑의 기단이 둘러 갈라졌다고 한다.  그런데 34년 뒤 다시 지진이 발생 당초 갈라졋던 기단석을 다시 붙여 놓았다고 한다. 이를 본 신도들은 이런 현상이 틀림없이 부처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 이 탑이 영험이 있다고 말해 왔다고 한다.

소안탑은 현장 법사가 역시 당 때 지은 대안탑과는 달리 내부가 어둡고 계단이 좁기 때문에 걸어서 올라가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탑 꼭대기에 오르면 사방이 확 틔어 주변 경치를 잘 볼 수 있다.

중국 사람들은 이 탑을 대안탑과 잘 비교한다. 즉 외형에서 거대하고 직선적인  대안탑을 남성으로 보는데 반해 오랫동안 풍우에 시달리면서 탑의 모서리가 부드러운 소안탑을 여성으로 본다.

아쉬운 것은 이 사찰에서 혜초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혜초가 이 사찰에서  금강지와 함께 밀교를 연구한 것이 740년이 되어 그의 수명을 생각하면 이 사찰에 머문 시간이 꽤 길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 사찰에서 오늘날 혜초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684년 세워진 이 사찰은 수의 양제와 당의 제4대 황제 중종이 황제로 즉위 하기 전 저택으로  사용했던 건물이 있었다. 이곳에 소안탑이 선 것은 707년으로 대안탑에 비해 탑의 규모가 적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이 사찰에는 고승 의정(義淨, 635~713)이 오래 머물렀기 때문인지 지금은 의정의 이름만 남아 있다. 의정은 671년 단독으로 페르시아 상선에 올라 해로로 인도네시아와 인도 등 30여 개국을 돈 후 695년 이 사찰로 다시 돌아와 경전을 번역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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