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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재발견
측천무후 백제 정벌계획 실천에 옯겨
신라, 연합군 일원으로 포로처리 못해 실망 안겨줘
기사입력: 2008/04/02 [14:46]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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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 편집이사

고종이 백제를 정벌하기 위해 나선 것은 660년 재위 11년이 되는 해였다. 이 때 고종은 말만 황제였을 뿐 모든 실권은 이미 측천무후에게 넘어가 있었다. 따라서 실제로 백제 정벌을 계획한 것은 측천무후였다. 그는 백제를 멸망시켜 고구려를 고립시키면 나중에 고구려까지 정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따라 660년 3월 고구려 정벌의 전초전으로 백제 침공을 단행했다.

이 때 김인문은 당의 출병을 독려하기 위해 중국에 머물고 있었다. 고종은 소정방을 대장으로 그 아래 김인문을 부총관으로 삼아 12만의 육군을 파병했다.

당시 백제의 의자왕은 나당 연합군의 침략을 꿈도 꾸지 못한 채 간신배들의 말을 들어 국방을 소홀히 했다. 의자왕은 나당 연합군이 침공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을 막기 위한 전략을 짰지만 이마저 정보 부족으로 실패하게 되고 결국 계백장군의 황산벌 싸움에 기대를 걸게 되었다.

 전쟁 초기 계백장군이 이끈 5천의 결사대는 신라를 상대로 용감하게 잘 싸웠지만 결국 중과 부족으로 패하고 말았다.

아쉬운 것은 전후 처리에서 신라가 보인 행동이다. 당시 신라의 태도를 보면 말이 연합군이지 전후 처리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행동하지 못했다.

우선 당은 나당 연합군을 구성하면서 무열왕 김춘추의 직위를 총관으로 해 대총관인 소정방 아래에 두었다. 3월에 시작한 전쟁은 7월에 끝나 부여에서 항복의식이 치러졌다. 이 자리에서 당과 신라의 장수들이 줄지어 서 있는 가운데 의자왕과 신하들이 땅에 엎드려야 했다. 의자왕이 술잔을 올리자 백제 장수들은 대성통곡했다.

 
▲  부여 정림사 5층탑에는 백제망국의 한이 서려 있어 지금도 이 탑을 보는 사람들을 가슴아프게 한다.
태종 무열왕도 이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무열왕은 이 자리에서 어리석은 짓을 했는데 그것은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의 선봉장에 섰던 금일과 모척 등 두 장수를 찾아내어 목을 벤 것이다. 대야성 전투에서 무열왕은 딸 고소타와 사위 품석을 잃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대야성 전투가 끝난 지 20여년이 지난 뒤였기 때문에 그의 이런 행동은 개인감정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전쟁이 끝난 뒤 당군은 전리품으로 1만 3천여 명의 백제 사람을 포로로 데리고 갔다. 포로는 백성들만이 아니었다. 왕족들은 물론이고 의자왕까지도 장안으로 잡혀 갔다. 소정방은 포로들을 배에 가득 싣고 사비성 아래에 있는 대왕포에서 출발했다. 이것을 보면 포로 처리에서도 신라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한 것이다. 한마디로 동족이 포로가 되어 이국으로 끌려가는데도 물끄러미 지켜만 보았다.

 중국에 잡혀  간 백제인들이 낯설고 물  설은 이국땅에서 얼마나 고생했나 하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백제 포로들은 당시 미개척지인 서주와 연주 일대로 강제로 이송되어 노역에 종사해야 했다.

일부 백제인들은 일본으로 가기도 했다. 백제가 부흥운동을 할 때 왜병들은 적극 백제군을  도왔다.

『백제 본기』는 당시 벌어진 백강 전투에 대해 "신라가 왜병과 맞닥뜨려 4번 모두 이기고 백 400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닷물도 붉은 빛을 띠었다"고 적고 있다. 이 전투에서 왜가  패함으로 백제의 부흥 운동은 구심점을 잃었다. 부흥 운동의 거점이었던 주류성도 백강 전투에서 패한지 열흘 뒤 나당 연합군에 의해 함락된다. 백제로 보면 백강 전투는 최후의 부흥 전쟁이었다.  

 이 때 왜는 이미 3년 전에 멸망한 백제에 1천척의 배와 2만 7천의 군사를 보내었다. 당시 왜가 이처럼 대군을 파병한 것은 백제의 부흥운동이 그 만큼 활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병이 이 전투에서 패하자 이때를 전 후해 많은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갔다.

실제로 대마도와 일본 규슈 지방을 돌아보면 이 때 일본으로 간 백제인들이 혹 있을지 모를 신라인들의 일본 침공을 걱정해 쌓은 성들이 많다.

이들은 물론 포로로 간 것이 아니고 자발적으로 간 것이다. 일본은 이 때 일본으로 온 백제인들을 도래인으로 부르면서 우대했다. 일본에 온 백제인들은 처음에는 집단을 이루어 살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열도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도 했다. 이들은 백제의 뛰어난 문화를 가는 곳 마다 심어 일본인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신라로 이거한 백제인들도 많았다. 후일 백제가 신라에 병합되었을 때 백제의 선진 기술을 전파했다. 특히 건축에서 선진 기술력을 갖고 있었던 이들은 뛰어난 건축 기술을 신라에 심어 통일 신라의 문화를 번창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궁금한 것은 이 때 당으로 잡혀간 의자왕의 뒷얘기다. 기록에는 당시 실권자인 측천무후가 의자왕을 죽이려고 하자 백제에서 가져간 보물을 상납해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살기를 원했던 의자왕은 망국의 한이 깊어서였을까 이곳에서 약 4개월 동안 살다가 죽었다. 『삼국사기』는 ‘왕이 병사하니 금자광록 대부위위경을 추종하고 옛 신하들의 문상을 허락했고 손호와 진숙보의 무덤 옆에 장사하고 비를 세웠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장안을 돌아보면 망국의 백성 백제인들의 탄식을 들을 수 있다. 요즘도 부여에서 장안까지 오는 것이 쉽지 않는데 포로의 신분으로 당시 그들이 이곳까지 어떻게 왔는지 궁금해진다.

역사학자들은 진숙보의 무덤이 북망산 봉황대 일대에 있기 때문에 의자왕도 죽어 이곳에 묻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북망산은 무덤 추정지역이 4km나 되고 중국 정부가 의자왕 무덤을 찾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아직 무덤을 찾지 못하고 있다.

장안 도심을 돌다보면 안강(安康)이라는 팻말을 볼 수 있다. 거리상 낙양보다 가깝지만 요즘도 산악지대가 되어 이곳을 가는 것이 쉽지 않다. 이 지역이 당시 포로로 끌려왔던 백제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다고 하니 백제인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백제 침공을 명했던 측천무후가 묻혀 있는 건릉도 장안에서 먼 곳에 있다. 건릉은 장안에서 버스로 2시간 정도 가야 도착 할 수 있다. 따라서 백제인들에게 이처럼 기막힌 슬픔의 잔영을 남겼던 이 능을 찾는 한국인들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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