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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재발견
초로의 나이에 대안탑 건립 직접 참여
기사입력: 2008/05/08 [16:36]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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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 편집이사
 
현장의 흔적이 남아 있는 자은사(慈恩寺)는 오늘날 서안 제일의 관광명소가 되어 있다. 도심에서 보면 이 사찰은 남쪽에 있다. 소안탑 보다 더 남쪽에 있다. 사찰이 유명하다 보니 도로의 이름도 사찰의 이름을 따 ‘대안탑로’다. 관광객들이 많기 때문인지 이 길은 항상 붐빈다. 대안탑은 탑 자체가 높아 이 거리에 오기 전 멀리서도 잘 보인다. 주황색의 대안탑은 외형이 우선 늠름하다. 사찰 주위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잘 정리되어 있다.

경내로 들어서면 곧게 난 길 끝에 정면으로 대웅보전이 있다. 이 건물 앞에는 ‘大慈恩寺’라는 금박 글씨가 쓰여진 대형 향로가 있다.

현장 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을 보관했다는 대안 탑은 향로를 돌아서면 있다. 탑 입구에는 비석이 있다. 탑은 돌로 된 기단의 높이만 해도 사람 키를 훨씬 넘는다. 외형적으로는 천년의 세월을 넘었지만 완벽하다.

이 탑이 건립될 때 이미 현장은 초로가 되었지만 그는 직접 탑을 세우는데 참여했다고 한다. 죽음의 길인 실크로드를 다녀온 초로의 법사가 무거운 벽돌을 들고 이 탑을 오르내렸을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존경심이 일어난다.

기단이 높다보니 탑에 일반인들이 접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탑 안을 들여다보는 것도 힘들다. 그러나 이 탑이 1천400여 년 전에 세워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세월의 무게만 따져도 경외감을 갖게 된다.

탑을 지나면 전시관이 있다. 전시관 중앙에는 당시 장안의 도시를 보여주는 모형도가 있다.  모형도 중간에 앉아 장안을 내다보는 큰 동상이 있는데 동상의 주인공이 태종이다.

태종은 황제가 되기 위해 형제를 죽이고 아버지를 협박 하는 등 패륜을 저질렀지만 나중에 정치를 잘해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이룩했던 인물이다.

태종은 황제가 되기 전에는 부친을 도와 국방을 튼튼히 했고 황제가 된 후에는 인재를 등용해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당시 현장 법사의 행동 중에는 황제를 무시하는 무례도 있었지만 그는 현장 법사의 사람됨을 누구 보다 잘 읽었기에 현장 법사가 이처럼 큰일을 할 수 있었다.   

전시관 사방으로는 현장 법사가 태어나서 승려 시험을 치는 장면에서부터 서역을 다녀오는 내용이 담긴 그림이 있다. 태종 동상 주위로는 큰 액자들이 걸려 있는데 이 액자들 중 특히 ‘현무문의 난’이 눈에 띈다.

‘현무문의 난’은 무덕 9년(626) 6월 이세민이 황궁의 북문인 현무문으로 들어오는 황태자 이건성을 무참히 살해한 후 자신이 황제가 된 사건을 말한다. 이 때 아버지 고조는 이미 이건성을 태자로 책봉한 뒤가 되어 고조가 죽은 후에는 자연히 이건성이 황제가 되는데 이세민이 이에 불만을 품고 형을 죽인 것이다.

그는 형만 죽인 것이 아니고 형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막내아우 이원길도 죽인 후 고조를 태상황으로 물러나게 한 후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

그의 집권은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즉위 후 그는 정치를 잘 해 당 나라 제국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는 집권 후 위징(魏徵), 마주(馬周), 이적(李勣)등 과거에 자신의 적이었던 인물을 등용하는 개혁정치를 표방했고, 언로를 활짝 열어 유능한 관료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또 부역과 형벌을 줄이고 관제를 정비했고 문학과 유학을 장려하고 과거를 실시하는 한편 역사서 편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자신의 재임 기간동안 관동과 관중 지역에 기근이 오자 창고를 풀어 백성을 구흘했으며 관원을 많이 줄여 국가 재정 지출을 줄였다.

국방에도 심혈을 기울여 토번, 고창, 서돌궐 등 이민족과 관개 개선을 꾀하는 동시에 정벌을 통해 정국을 안정시키고 국토를 확장했다.

이 같은 태종의 치적을 ‘정관의 치’라고 부른다. 특히 그가 재임 하는 동안 가신들과 나눈 대화를 책으로 묶은 ‘정관정요’는 군주의 도리나 인재 등용, 체납과 도덕의 기준이 되어 태종 이후 중국 역대 위정자들의 필독서로 통하고 있다.

이 책은 이외에도 학술, 문화, 형벌, 부역, 정치, 군사에 대한 깊은 내용이 들어 있어 요즘도 많은 위정자들이 중요문헌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당나라 황금시대를 연 태종은 말년에 들어서는 잦은 고구려 원정으로 국력을 낭비했고 또 신라가 여왕에 의해 통치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발언을 자주 해 신라가 내란을 겪기도 했다.

 태종이 황제로 있을 때 신라는 27대 선덕여왕의 시대였다. 당시만 해도 신라와 당은 교류가 잦아 신라 사신들이 당을 자주 찾았다. 그런데 태종은 신라 사신들을 만날 때 마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 등 주위 국가들로부터 침략을 받는 것은 나라를 여자가 다스리기 때문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당시 신라의 상대등 자리에 있었던 비담은 태종의 말을 믿고 선덕여왕 말기 난을 일으켰다. 비담은 난을 일으킨 후 한 때는 기세가 높아 명활산성을 무대로 버티었고 이 때문에 선덕여왕은 난을 평정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

이 난을 선덕여왕이 돌아 간 후 결국 김춘추와 김유신에 의해 평정되지만 이 난으로 인해 신라는 많은 중신들이 제거 되는 등 정치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

태종의 그림자가 이처럼 짙게 드리워져 있는 대안 탑을 보는 한국인들이 아쉬워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경주 황룡사 탑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경주 황룡사탑은 대안탑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다. 그리고 탑의 높이를 보더라도 9층탑 70m가 되어 이와 비슷하다.

그런데 황룡사탑이 몽고족의 침입으로  소실된데 반해 대안탑은 아직 건재해 당시 당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현장 법사는 죽은 후 사리탑을 남겼는데 이 사리탑은 흥교사(興敎寺)에 있다. 그런데 이곳에는 신라 출신 승려인 원측의 사리탑도 함께 있어 우리들의 관심을 끈다.

흥교사 건물은 전란으로 파괴가 된 것을 1922년과 1939년에 다시 건립했다. 이 사찰 입구로 들어서면 나무들이 우거진 정원 뒤로 3개의 사리탑이 보인다. 이중 중앙의 큰 탑이 현장의 사리탑이고 원측의 사리탑은 현장 사리탑 옆에 있다.

원측은 신라 왕자로  3세에 출가해 진평왕 46년(627) 당나라에 건너가 유식론(唯識論)의 대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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