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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여성운동 이끈 여성지도자 이희호 여사 영면에 들다
DJ까지 바꾼 ‘1세대 페미니스트’ 미국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지식인
기사입력: 2019/06/21 [10:06]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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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모근 기자

 

[울산여성신문 문모근 기자] 서울대 사범대와 미국 유학을 마친 뒤 국내 여성운동을 이끌며 주목받는 사회운동가로 활동한 이희호 여사가 별세했다. 그녀가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결혼할 때 모두가 말렸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며 안된다고 그녀를 설득했고, 선배들은 결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 공작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마흔 살 신부는 미국 유학까지 갔다 온 엘리트 지식인으로 차세대 여성 지도자로 주목받는 미래가 밝은 ‘이희호’였다. 서른여덟 살 신랑은 정치 낭인으로 두 아이에 심장판막증을 앓고 있는 여동생까지 딸린 빈털터리 홀아비 ‘김대중’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은 이희호의 외삼촌 이원순의 한옥집 대청마루에서 진행됐다. 빈손이었던 신랑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신부의 아이디어였다. 신랑이 얼마나 돈이 없었던지, 결혼 반지도 신부였던 이희호가 준비했다.

 

결혼식에 모인 이희호의 하객은 가족과 YWCA 선후배 100여 명이나 됐지만, 김대중의 하객은 두 동생을 비롯해 몇 명 뿐이었다. 그렇게 이희호는 빈손뿐인 김대중과 1962년 5월 10일 결혼을 했다.

 

“나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원대한 목표가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나와 아이들을 돌보아주기를 바랍니다. 나도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김대중) 사람들이 왜 김대중과 결혼했느냐고 질문하자 이희호는 “잘생겼잖아요”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한편으로 이희호는 “이 사람을 도우면 틀림없이 큰 꿈을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 1963년 김대중 대통령은 전세였던 동교동 작은 주택을 구입하면서 아내 이름이 새겨진 문패를 함께 달았다. 사진은 1982년 미국으로 망명한 부모를 대신해 동교동을 지켰던 장남 김홍일까지 걸려 있던 문패 ⓒ김대중평화센터     © UWNEWS

 

아내 이름을 문패에 달았던 남편 김대중

 

이희호 여사는 감리교 신자였던 부모 밑에서 자란 모태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토머스 모어’라는 세례명이 있는 가톨릭 신자였다. 보통 결혼하면 남편의 종교를 따라가는 당시 풍습과 다르게 이희호 여사는 감리교 신자로 평생 살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결혼 후 문패를 만들면서 ‘이희호’ 여사의 이름도 함께 달았다. 가부장적 의식이 팽배했던 당시 사회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부부 문패를 단 건) 아내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발로였다. 그런데 막상 그렇게 하고 나니 문패를 대할 때마다 아내에 대한 동지의식이 자라났다. 미처 생각하지 못한 감정이다.” (김대중 대통령) 

 

김대중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를 가리켜 ‘동지’처럼 대했고, 항상 서로가 존댓말을 사용했다. 아내가 남편의 부속물처럼 취급받던 시대에서는 낯선 풍경이었다.

 

이희호 여사는 한 번도 남편에게 페미니즘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이 페미니스트적인 관점과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 때문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내가 나름대로 페미니스트적인 관점과 행동을 실천할 수 있었던 건 아내의 조언 덕이었다. 아내와 결혼하기 전에도 여성을 비하하는 여러 행동들이 옳지 않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지만, 나 역시 가부장적인 전통 관념에 찌들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비하와 멸시의 관념으로부터 해방되고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로서 여성을 대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도움 때문이다. 아내 덕분에 나는 인류의 나머지 반쪽을 찾을 수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 

 

 

▲ 1959년 이희호 여사가 활동했던 YWCA의 첫 캠페인은 ‘혼인신고 합시다’였다. 196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축접자에 투표하지 말라’는 피켓을     ©UWNEWS

 

1세대 페미니스트 이희호의 별명은 ‘다스’ 

 

이희호 여사는 대한민국의 1세대 페미니스트라고 볼 수 있다. 서울대 사범대를 다닐 때 이희호 여사의 별명은 독일어에서 중성 관사를 뜻하는 ‘다스'(das)였다. 걸음걸이도 빠르고 행동도 여성인지 남성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그녀를 ‘다스’라고 불렀다.

 

“신입생 환영회 같은 행사에 남녀 학생들이 같이 모이면, 남학생들은 맥주를 사다가 마셔요. 그런데 여학생들은 남학생들 앞이라고 수줍어서 과자도 제대로 집어먹지 못하고 고개만 수그리고 있어요. 여자들 스스로 자기를 낮추는 거예요. 그런 모습을 참을 수 없어 후배 여학생들에게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당당하게 앞을 보라고 했어요. 또 모임이 있을 때는 여학생들이 마실 수 있도록 음료수를 준비해 달라고 요구했지요.” (이희호 여사) 

 

1950년 서울대를 졸업한 뒤 미국 유학을 준비했던 이희호 여사는 한국 전쟁으로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부산 피란 생활 중에 이희호 여사는 ‘대한청년단’을 조직해 참여했지만, 군 위문 공연 활동에 치우치자, 1년 만에 나왔다.

 

이희호 여사는 1952년 여성계 지도자들과 함께 ‘여성문제연구원’을 조직했고, 나중에는 남녀차별 철폐운동을 통해 가족법 개정까지 이끌어내는 성과를 올렸다. 호주제 폐지까지 이어진 여성 운동의 시작이었다.

 

1954년부터 1958년까지 미국 미국 램버스 대학과 스캐리대학에서 사회학 석사과정까지 밟고 돌아온 이희호 여사는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연합회’ 총무로 전국을 누비며 여성 운동가로 활동했다.

 

당시 이희호 여사가 벌인 캠페인은 ‘혼인신고를 합시다’였다. 당시에는 결혼을하고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 뒤에 첩으로 들어온 사람이 혼인신고를 하면서 쫓겨난 조강지처가 많았다. 법적인 일부일처제를 현실화시켜 여성을 보호하는 운동이었다.

 

이희호 여사가 활동했던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YWCA)연합회’는 국회의원 선거 때는 ‘축첩자를 국회에 보내지 말자’라며 지금의 낙선 운동까지 벌였다.

 

시대를 앞서가는 진보적 여성 운동 방식과 현실을 꿰뚫는 통찰력을 본다면, 이희호 여사는 대통령 부인이 아니었어도 여성운동가로 충분히 성공했을 것이다.

 

 



김대중이 대통령 돼서 독재하면 제가 타도하겠다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희호 여사는 연단에 올라 연설을 했다. 당시 이희호 여사의 찬조 연설은 대통령 후보 부인으로는 최초였다.

 

이희호 여사는 무조건 남편을 찍어달라는 얘기만 하지 않았다. “여러분, 제 남편이 대통령이 되어서 만약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라며 대통령 남편을 감시하는 부인이 되겠다는 말도 했다.

이 여사는 “22만명이나 많은 여성들의 주권 행사에 나라의 운명이 좌우된다”라며 여성 유권자들이 나서서 투표할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우리는 흔히 이희호 여사를 김대중 대통령의 옥바라지를 했던 아내로만 기억한다. 그러나 이희호 여사의 삶은 단순히 영부인이라는 말로 단정 짓기 어렵다.

 

그녀의 삶을 관통하는 단어는 여성과 인권이었다. 차별받는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했던 그녀는 정치인 김대중을 선택해 꿈을 이루도록 도와줬고 그 과정에서 여성 인권을 위한 방법을 함께 모색하고 노력했다.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일상화된 사회였다. 이 단어들의 핵심은 ‘여성 인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평생 여성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한 길을 걸어왔던 이희호 여사는 진정한 페미니스트라고 볼 수 있다.

이희호 여사는 대학 시절부터 여성 지도자 양성과 여성 권익신장을 위한 결심을 하고 YWCA 총무를 역임하시는 등 평생 헌신하였다.

 

김대중 대통령과 결혼 후에는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통일을 위한 독지와 동반자로서 고난을 함께 했다. 영부인으로서 양성평등법 제정, 여성부 신설 등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여성재단을 만드시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IMF 외환위기 때 결식아동을 위해 사단법인 사랑의 친구들을 창립하여 어려운 어린이, 청소년, 장애인들을 위해 사랑을 나누었다.

 

특히 남과 북이 평화롭게 공동번영하기를 염원하였고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과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 어린이 돕기에 앞장섰고 계속 노력하였다. 2015년에도 평화적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평양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이희호 여사는 평생 어려운 사람들,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늘 함께하고 김대중 평화센터의 이사장으로서 남과 북의 평화를 위한 일을 계속하다가 소천한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이희호 여사가 2019년 6월 10일 향년 97세로 별세했다. 

 

이희호 여사는 유언을 통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첫째는 우리 국민들께서 남편 김대중 대통령과 자신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두 번째로 동교동 사저를 대통령 사저기념관(가칭)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노벨평화상 상금은 대통령 기념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도록 말했다. 

 

이 유언을 받들어 변호사 입회 하에 세 아들의 동의를 받아 유언장을 작성했다. 유언 집행에 대한 책임은 김성재 김대중평화센터 상임이사에게 맡겼다.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 기념사업과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위한 김대중평화센터 사업을 잘 이어가도록 당부했다.

 

오늘은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보다 여성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한평생 살아온 여성 운동가로 그녀를 기억하고 싶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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