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가 제례 상에서 홀 때 받는 이유 2
▲ 김옥길(사)한국전례원 명예교수 ©UWNEWS | |
본래 우리나라에는 사과가 없었는데, 효종의 사위인 정재륜(鄭載崙)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사과나무를 들여온 뒤부터 우리나라에 많이 펴지게 됐다고 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 이규경도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참고로 병자호란 이전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과일은 있었다. 지금과 같은 품종의 사과가 아니라 능금이었다. 보통 능금을 사과의 옛 이름 혹은 사과의 사투리나 옛 말로 알고 있지만 능금과 사과는 품종이 다르다. 능금은 사과보다 작고, 과즙은 많으나 맛이 덜하다. 능금 외에도 내자(奈子)라고 하는 토종사과가 있었다.
그렇지만 정재륜이 개량종 사과를 들어오면서 토종과일인 능금과 내자는 점점 경쟁력을 잃어 지금은 찾아보기조차 어려워졌다. 약 120년 전 필자의 재종숙(7촌숙부)상에 부조록(扶助錄)에 빈과(?果)가 적혀있었다. 자전에 찾아보니 ‘능금, 사과’라고 하였다.
『오:주연:문 장전 산:고(五州衍文長箋散稿)』조선왕조 헌종(憲宗)때 이 규경(李圭景)이 중국. 우리나라 등의 고금의 사물, 곧 천문. 시령(時令). 지리 풍속. 관작. 궁실(宮室). 음식. 금수(禽獸)등을 기록하고, 의심되거나 잘못된 곳을 고증하고 해설한 책. 6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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