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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막강한 진시황 위세, 위엄 보여줘
5천만 관광객 방문으로 5조원 수입 올려
기사입력: 2008/02/26 [10:54]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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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 편집이사

▲     병마용갱에서 발굴된 군사와 말은 규모가 크로 기세 또한 당당해 진나라시대 시황의 위세가 얼마나 높았나 하는 것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 서안이 세계 4대 유적지 중의 하나가 된 것은 최근 발굴된 병마용갱의 역할이 크다. 병마용은 흙으로 만든 군사와 말을 뜻하는데 병마용갱은 이것이 묻혀 있는 토굴을 말한다.  1974년 초봄, 양신만(楊新滿), 양지발(楊志發), 양준붕(揚俊鵬)씨가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여산 아래에서 우물을 파고 있었다. 마을 남쪽 감나무 숲에서 우물을 파던 이들은 우연히 형체가 특이한 인형과 옛 청동화살을 발견했다.

이들 물체가 지난 2200여 년 동안 땅속에서 진시황릉을 지켰던 병마용구라는 것을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까지 기록과 구전으로만 전해 왔던 신비의 제국 진나라의 생생한 역사는 이렇게 해 그 진상을 세상에 드러내게 되었다.

이후 발굴을 시작한 고고학자들은 이곳에 진시황 병마용갱이 있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학자들은 우선 규모에 놀랐다. 그들은 1974년 1호 병마용갱을 발굴한데 이어 1976년에는 2호갱과 3호갱을 발견했다. 갱내에는 실제 사람과 말의 크기가 비슷한 도용(陶俑)과 도마(陶馬)가 8천여 점이나 매장되어 있었다.

 보병과 기병, 궁노수, 어수, 사령기관 등 방대한 군사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들은 100여대의 전차를 타고 있었다. 힘찬 기세로 위풍도 당당한 이들은 옛날 진시황이 천하 통일을 할 때 직접 전투에 투입되었던 용감한 병사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 유적의 발견은 중국은 물론이고 세계인들을 놀라게 했다. 병마용갱이 발견된지 이미 30여년이 넘었지만 발굴 작업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1979년 중국정부는 병마용갱 유적위에 진시황병마용 박물관을 세웠다. 이 건물은 일본 기술진이 세웠다.

  중국 정부는 현재 1, 2, 3호 갱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이곳에 전시 해 놓고 있다. 박물관 건립 후 지금까지 이곳을 찾은 사람은 5천 만 명에 이르고 이들이 뿌린 돈만 해도 5조원이나 된다.

세계 유명 인사들도 이곳을 많이 다녀갔다. 전 싱가폴 총리 이광요는 이곳을 둘러 본 후 ‘세계적인 기적이요 중국의 자랑’이라고 칭송했고 전 프랑스 대통령 시라크는  ‘현존하는 세계 7대 불가사의는 이를 포함해 8대 불가사의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병마용갱은 그동안 해외 전시도 여러 차례 했다. 지금까지 이들 유물들이 전시된 나라만 해도 30여 개국이 넘는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전시회가 열려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87년에는 인근 여산릉과 함께 병마용갱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었다.

  병마용갱은 진시왕릉에서 동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지금까지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은 중국에서도 가장 값진 유산으로 평가 받고 있다. 진시황의 공격 명령만 기다리는 병사들의 모습은 옛 진나라 군대의 축소판이다.

역사서는 진나라 병력에 대해 ‘갑옷을 입고 있는 병사가 100만 , 전차가 1천여 승, 말이 1만 마리가 넘는다’고 표현해 놓고 있는데 병마용갱에 나타난 유물들은 이 기록을 사실화시켜주고 있다.

이들 유물들은 진의 강대하고 활발한 군사력을 재현해 시켜 놓았을 뿐만 아니라 군 편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고대 중국의 병력 배치와 전략과 전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3개의 병마용갱 중 규모가 가장 큰 1호갱은 동서 길이가 230m, 남북 62m, 총면적이 14,260㎡로 장방형의 모습이다. 이 갱에는 약 6천점의 도용과 도마가 있고 이외에도 40여점의 전차가 포진해 있다.

보병용은 한열에 68점으로 모두 200여점이 있는데  갑옷도 투구도 없이 머리를 땋아 놓아 흡사 선비 같은 모습이다.

선봉 뒤로는 격리벽이 있고 이곳에도 병력이 있는데 이들은 갑옷을 입고 창과 칼을 들고 있다. 또 일부는 화살을 들고 있는 무사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질서 있게 서 있고 조직이 면밀하고 견고하게 보여 강군임을 알 수 있다.

2호갱은 1호갱에서 북동쪽으로 약 20m 떨어진 곳에 있다. 갱은 동서가 124m, 남북이 98m로 면적은 6천여㎡다. 이 갱은 아직 발굴이 진행 중에 있는데 발굴측은 이곳에 무사용 90여점, 전차용 말이 350여말, 기병용 말이 116마리, 나무 전차가 90여승 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이 갱은 보병과 기병, 궁노수, 전차 등 병이 혼합 되어 있다.

이 갱에서 눈을 끄는 것은 궁노들의 모습이다. 궁노수는 모두 330여명으로 이중 160여명은 무릎을 꿇고 앉아 활을 쏘는 모습이고 다른 170여명은 서서 활을 쏘는 모습이다. 전쟁을 할 때는 이들이 함께  적을 향해 활을 쏘아 적병의 접근을 막았다고 한다.

전차 6승을 보조하고 있는 108명의 기병 모습도 특이하다. 이들은 싸움터에서 기습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다. 군사전문가들은 2호갱의 병마는 용병원칙을 생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3호갱은 규모면에서는 셋 중 가장 작지만 이곳에서 도용 66점이 발견되었다. 3호갱은 1, 2호갱처럼  무사들이  전투대열로 편성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이곳 병사들은 의장용 무기인 청동술을 손에 들고 얼굴을 맞대고 있어 사령관을 보호하고 있는 경비부대임을 보여준다. 이곳에서 제사용  사슴뿔과 짐승 뼈도 발견되었다. 또 손잡이가 있는 청동환도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병마용갱은 인파들로 넘쳐나고 있다.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어 밀려다니는 형편이다. 따라서 다른 유적지처럼 여유를 갖고 유물들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부족할 뿐 아니라 기념사진을 찍는 것도 쉽지 않다. 유물의 경우 일반적으로 숫자가 많으면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곳 병마용갱에는 병사들의 모습을 한 유물들이 엄청나게 많지만 이들 모두가 특이한 전투 모습을 하고 있어 숫자에 밀려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록 실물이 아닌 병마용이긴 하지만 이 속에서 진나라 시대 용맹스러운 병사들을 만날 수 있고  이들 병사들을 볼 때면 진시황이 위세를 떨치고 중국 통일의 위엄을 실현할 수 있었던 힘이 어디서 나왔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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