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기획/특집
기획취재
[기획]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를 따라 탐방하는 울산의 명승, 유적지 6
울산왜성(蔚山倭城)
기사입력: 2022/02/24 [16:04]   울산여성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UWNEWS

 

 

 

 

▲ 정미현 울산문화관광해설사     ©UWNEWS

  울산왜성은 도산성(島山城) 혹은 시루성(甑城)이나 증성(甑城)이라고도 하며, 일제강점기부터 학성공원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왜성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우리나라의 동남해안에 왜군이 지은 성으로 현재 삼십개가 넘는 왜성지(倭城地)가 있습니다. 

 

  울산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때 가토기요마사에 의해 지어진 서생포왜성과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역시 가토기요마사의 설계와 오다 가츠요시의 감독하에 지어진 울산왜성이 있습니다. 울산왜성의 석재는 대부분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헐어서 40여일 만에 완성했다고 합니다.

 

  울산왜성은 우리나라의 성과는 달리 하나의 성 안에 다수의 구획(曲輪:郭)을 계단식으로 축조하였습니다. 

 

  울산왜성은 해발 50m인 정상에 본환을 배치하고, 본환 아래 북쪽 해발 35m 지점에 이지환을 배치였으며, 그 아래 삼지환을 배치하였습니다. 태화강을 접한 남쪽을 제외한 3면에 토루를 쌓고 그 위에 목책을 설치하여 외성을 구축하였으나 지금은 도시화로 인해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또한 남쪽으로는 군수물자 및 병력수송을 위해서 항시 성 아래까지 배를 댈 수 있도록 ‘凹’(요)자 형태의 선착장을 만들어 외부에서는 보이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또 축조 시 성벽은 자연할석(割石)을 이용하여 잔돌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60도~70도 정도 경사지게 쌓았으며, 성벽모서리는 석재의 긴 면과 짧은 면을 서로 교대로 하여 깍지를 끼듯 서로 맞물리게 쌓았습니다.

 

  이곳에서 1597년부터 1598년 사이에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두차례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5만여명의 조명연합군은 성을 완전히 포위하고 급수로를 차단시켜 왜군들은 아사직전까지 갔습니다. 

 

  성안에는 우물이 없어서 물을 구하러 나온 왜군은 조명연합군에게 잡히기도 하고, 성안에 고립된 왜군은 식량은 물론 식수가 없어 오줌을 마시고, 말을 죽여 피를 마셨습니다. 그런데 대규모의 왜군의 구원병이 울산으로 들어오게 되면서 조명연합군은 역포위 될 상황이 되어 경주로 후퇴하게 됩니다.

 

  이후 조·명연합군은 다시 9월에 2차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결국에는 양자 모두에게 성과가 없는 전투가 되었습니다. 비록 조명연합군이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지옥 같은 갈증과 굶주림에 시달린 가토기요마사에게 악몽 같은 교훈을 남겼습니다. 

 

  왜군은 1598년 8월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사망으로 11월 초순경에 철군하게 되고, 왜군 철수 후 울산군은 의병의 큰 활약을 인정받아 울산도호부로 승격하게 됩니다. 또한 서생포왜성과 마찬가지로 울산왜성은 조선 수군의 진영으로 이용되었으며, 인조2년(1624)에서 효종5년(1654)까지는 배를 만드는 전선창을 두기도 했습니다.

 

 

  당시 전투 상황이 그려진 ‘울산성전투도’는 울산왜성에 갇힌 왜군을 구원하기 위해 김해 죽도왜성에서 달려온 사가현(佐賀縣) 번주(藩主)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가 화공에게 시켜 그린 그림입니다. 

 

  원본은 1847년 사가의 난 때 소실되고 현재의 그림은 1886년에 오쿠보 세츠도(大久保雪堂)가 제작한 작품입니다. 현재 일본 큐슈 북쪽 나고야성의 임진왜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데, 여섯폭의 병풍에는 치열한 전투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또 일본의 종군 승려 케이넨(慶念)의‘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서“1597년 7월 29일, 해변에 시체로 산이 이루어졌네. 도대체 어디까지 계속될지 그 끝이 보이지 않는구나.”라고 기록된 것을 보아 당시 상황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짐작 할 수가 있습니다.

 

  전쟁으로 인적·물적 피해가 가장 컸던 조선은 사회가 혼란해지고 지배층의 권위가 떨어졌습니다. 전국토가 황폐화되었고, 인구가 감소하였으며,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습니다. 

 

  조선은 유교의 윤리를 강조하여 사회를 재정비하고 세금제도를 개선해서 피폐해진 국가 재정을 해결해 나가게 됩니다. 명나라는 청나라로 왕조가 교체되었으며, 일본도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한 후, 세키가라하 전투를 거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로 정권이 교체 됩니다.

 

  삼국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울산왜성은 현재 학성공원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이 곳은 1913년 김홍조가 주변의 땅을 사들여 곰솔, 벚꽃, 매화 등을 심어 조성하였고, 김홍조 사후에 아들 김택천에 의해 울산군에 기증되었습니다. 

 

  삼지환에는 울산출신 독립운동가 박상진의사의 추모비와 동요작가 서덕출의 노래비 그리고 시민들을 위한 편의시설도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지환(二之丸)은 동백꽃길이 조성되어 있으며 김홍조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고, 본환에 오르면 저멀리 울산대교를 비롯해 아름다운 울산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맞은편에 보이는 충의사에 임란 의사 242위를 봉안하여 매년 춘추대제(4월 15일, 10월 15일. 서생포 왜성은 10월 20일)로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한민족에게 큰 고통과 상처를 안겨준 왜군들이 축조한 성을 굳이 보존하는 이유는 뭘까요? 왜성도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역사유적입니다. 아픈 역사이지만 성찰하고, 후손들에게 역사적 교훈을 물려주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역사자원으로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울산왜성과 맞은편에 있는 충의사를 함께 들러보신다면 더욱 뜻 깊은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이동
메인사진
[임영석 시인의 금주의 '詩'] 눅눅한 습성 / 최명선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인기기사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