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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를 따라 탐방하는 울산의 명승, 유적지 5
외솔 최현배 기념관(2)
기사입력: 2022/02/09 [13:48]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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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울산 문화관광해설사 정덕모     ©UWNEWS

  흥업구락부는 이승만의 요청에 의해,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보낼 군자금 염출을 결의하고 수만 원을 모금해 미국으로 보내는 등 독립운동을 직접·간접으로 지원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되어 1938년에 안재홍 등 흥업구락부 간부 회원을 포함하여 100여 명을 검거하고, 이중 구자옥 등 52명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흥업구락부 사건이다. 

 

  이 사건에 연루된 외솔은 연희전문학교의 교수직을 박탈당하였고, 일부 독립운동 지사들이 일제의 문화통치에 이끌려 전향하는 사례가 발생하게 되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가 1910년 무단통치에서, 3.1운동을 기점으로 문화통치란 빌미로 민족의 분열을 조장하였고, 1930년대부터 일제의 통치 핵심은 민족 말살 정책이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가 이를 집약시킨 통치 구호였다. 이를 위해 일제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일본어 보급과 조선어 말살이었다. 

 

  1938년 신학기부터는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을 완전히 폐지했다. 또 철저한 감시를 통해 조선어를 사용하는 관리(官吏)나 학생을 단속했다. 

 

  아울러 민족주의적 색채를 지닌 단체를 내선일체의 방침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온갖 구실을 붙여 탄압하고 강제 해산시켰다.

 

  1942년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가던 함흥 영생 고등여학교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친구와 조선어로 대화를 나누다가 경찰에게 취조를 받았다. 

 

  학교 교사들을 상대로 탐문을 벌여 경찰이 체포한 사람은 미국에서 유학했던 교사 정태진이었다. 

경찰은 정태진을 조사한 결과, 그가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조선어사전 편찬 사무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로써 경찰은 대형 사건으로 조작 및 날조하였다. 

 

  정태진에게 고문을 가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단체이며,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사전을 편찬하고 있다’라는 허위 자백을 받아낸 것이다. 일본 경찰은 허위 자백서를 들고 조선어학회를 급습하여 회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이극로와 최현배 등 11명을 체포해 홍원 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이로부터 1943년까지 일제는 모두 33명을 체포하였다. 이들을 1년 동안 온갖 고문으로 짜맞추기 수사를 하여 치안유지법의 내란죄 혐의를 적용했다. 이 가운데 12명을 함흥지방법원으로 넘겼다.

 

  이 과정에서 이윤재와 한징은 고문과 굶주림, 추위 등으로 옥중에서 사망했다. 외솔은 「나의 걸어온 학문의 길에서 “나는 삼십여 명의 동지들과 비행기를 타고 혼절하였고, 물을 먹고 까물어 졌으며, 목총으로 머리를 난타 맞아 유혈이 낭자하였고, 곤장을 맞아 등과 궁둥이가 터졌으며, 발길로 종아리를 채여 워낙 상하였기 때문에 40도의 신열로 앓았으며, 쇠꼬챙이로 전신을 쑤시고 손바닥으로 뺨을 맞기는 항 다반사로 갖은 모욕과 천대를 받았다. ” 면서 〈임생각〉에서는 “임이여 어서 오소, 기다리다 애타오.” 구절은 외솔의 목숨이 경각에 처했던 고단했던 삶이 묻어 있다.

 

  1944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9차례의 재판 결과 이극로는 6년, 최현배는 4년, 이희승은 2년 6월의 징역형을 각각 선고받았다. 

 

  정인승, 정태진은 징역 2년을 받았다. 또 김법린, 이중화 등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다. 징역형이 선고된 이극로, 최현배 등은 고등법원에 항소했으나 광복으로 풀려났다. 

 

  외솔은 국어학의 연구, 국어정책의 수립, 그리고 교육학의 연구와 국어운동의 추진에 전념하였다. 먼저 「우리말본」과 「한글갈」의 저술이다. 주시경 이래의 문법 연구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20세기 전반기의 문법 연구를 집대성하였다. 그리고「조선 민족 갱생의 도(1930)」를 저술하여 민족주의적인 국민 계몽사상을 고취하였다. 

 

  특히, 문교부 편수국장을 6년간 재임하면서 학생들의 교과서 편찬의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국정 정책에 대한 큰 족적을 남겼다. 

 

  현행 각종 교과서에서 한글만으로 가로쓰는 체제를 확립한 일이다. 또한 외솔은 한글 기계화에도 크게 기여 하였다. 또한 한글은 한글학회를 중심 한 학자들에 의하여 계승되고 있으며, 그의 사상을 기리는 모임인 외솔회가 1970년에 창립되어 기관지 「나라사랑」을 발간하며, 해마다 국학 연구와 국어운동에 뛰어난 사람에게 외솔상을 시상함으로써 그의 정신을 이어가려 하고 있다.

 

 

 

  기념관의 출구에는 ‘한글이 목숨’이라는 외솔의 친필의 복사본이 전시되어 있다. ‘한글이 목숨’은 일제가 총칼로 서슬이 시퍼렇게 한민족의 말살 정책을 펼 당시 1932년 봄에 신문로에서 외솔 연희전문학교 교수와 동아일보 편집인 권덕규, 한글 발행인 신명균이 신문로의 음식점의 방명록에 남긴 친필이다. 이 친필은 다음 장의 라틴어 ‘VERITAS LUXMER’란 “진리는 나의 빛”과 대비되어 더욱 빛나고 있다.

 

  외솔은 평생을 한글을 지키고 연구하는 일에 진력하였지만 아픔도 있다. 1950년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선거 울산군 을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김택천 후보에 아깝게 낙선하였다. 그 후 향연 77세로 1970년에 타계하였다, 정부에서는 사회장으로 영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다. 

 

  묘지는 외솔의 운명을 바꾸게 한 주시경 선생님의 묘소 옆으로 영면하였다. 또한 주시경 선생의 묘소는 1981년 서울 현충원으로 이장되었고, 외솔은 2008년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때마침 중구청에서 외솔기념관 건립과 생가 복원이 진행 중이어서 외솔의 묘비는 이곳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외에도 외솔의 현충 시설은 외솔의 모교인 병영초등학교의 얼굴상과 장충단공원의 외솔 최현배선생 기념비, 남부도서관 등 여러 곳이 있으며, 교육청에서는 신설 학교의 교명으로, 중구청은 신설 도로와 다리 이름으로 외솔을 칭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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