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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태화강은 자장율사가 당나라 태화지(太和池)를 생각하며 지은 이름
울산의 태화루(太和樓)는 영남(嶺南) 3루(三樓) 중에서도 경관(景觀)이 가장 뛰어난 누각
기사입력: 2006/03/20 [13:54]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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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성 주필.시인

우리들이 여름이면 놀이터처럼 놀았던 이곳 나루터 위쪽 태화강의 용금수는 평소에도 상류에서 흘러오는 물결이 이곳에서는 물길이 밑으로 빠지듯이 휘감기는 곳이어서 웬만큼 수영을 잘 하는 아이들도 겁이 나서 접근을 하지 않는 곳이었다.

이곳에서 수영하다가 빠져죽은 아이들도 여럿 생겨나고 부터는 더더욱 용금수 근처에는 가지 않았고 우리들 사이에는 용금수 밑에는 거대한 동굴이 있고 그 동굴에는 용(龍)이 살고 있는데 그 용이 아이들을 잡아먹는다는 괴소문이 떠돌았고 사실 우리들은 그 말을 곧이 곧대로 믿었다.

▲  우리들이 다이빙 장소로 이용하던 절벽은 허물어지고 예식장 건물이 태화강을 짓누르고 있다.
후일 우리들은 성년이 되어서야 우리들이 수영과 다이빙을 즐기던 태화강 바위 위가 태화사지가 있던 곳이고 그 유명한 태화루가 있던 자리라는 것을 알았는데 이곳에는 정말 용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때의 고승인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8년간의 불도수행을 마치고 당나라 오대(五臺)를 떠나 태화지(太和池) 부근에 이르니 불현듯 문수보살이 나타나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백립(百粒)과 불아(佛牙) 및 홍가사(紅袈裟)를 주면서 신라로 돌아가면 불교를 크게 중흥시키라는 당부를 받게 된다.
 
이 같은 문수보살의 당부를 듣고 떠나려는데 태화지에 살고 있던 용이 나타나서 해동 신라국에는 나의 작은 아들이 살고 있으니 내 아들의 식복(食福)을 빌어주는 절을 세워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게 된다. 자장율사는 태화지 용의 애원을 수락하고 신라로 돌아 왔다.

그 후 자장율사는 문수보살과 태화지의 용이 부탁한대로 신라 곳곳에 절을 세우게 되었는데 이 중 한 절이 울산의 태화사였다.
 
자장율사는 문수보살이 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백알을 삼등분해서 황용사탑과 양산통도사의 계단(戒壇)과 울산의 태화사 부도에 각각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태화사는 양산통도사에 버금갈 정도로 신라 10대 사찰 중의 하나였다고 하는데 당나라 태화지의 이름을 따서 태화사라 하였고 이 태화사 앞을 흘러가는 강을 태화강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당나라 태화지에 살던 용의 작은 아들이 이곳 태화강 상류의 물길이 휘감아 치는 용금수에 살았는데 이곳을 그 당시에는 황용연(黃龍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런 내력을 알고 난 후에는 우리들이 어린 시절 용금수에는 용이 살고 있다며 두려워했던 사실들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실소를 금치 못했었다.

그리고 요즘 복구 논란에 휩싸인 태화루는 태화사지가 전란(戰亂)으로 모두 파괴되었을 때  유일하게 남루(南樓)의 범종각(梵鐘閣)만이 강 벼락에 우뚝 솟아 있었다고 하는데 이 범종각이 후일에 그 유명한 태화루인 것이다.
 
▲    옛날 주막이 있던 곳과 태화강 나루터가 있던 장소.
이 태화루는 문헌에 의하면 벼랑 아래에 굽이치는 강물과 그 강물을 끼고 흐르는 강변에는 대나무와 소나무의 군락들이 그림같이 진을 치고 있었고 고개를 들어 바다 쪽을 바라보면 갈매기가 끼룩거리며 무리지어 날아다니는 울산만이 펼쳐져 있는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과 같은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곳 태화루가 얼마나 아름다웠느냐는 우리나라 근세 사학의 큰 별인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진주에는 촉석루가 있고 밀양에는 영남루가 있지만 그 보다도 더 훌륭한 누각은 울산의 태화루라고 극찬하고 친필로 태화루(太和樓)의 현판을 써서 걸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울산의 태화루가 영남 3루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누각이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유서 깊은 자리에 호텔 건축허가를 내준 것 자체가 문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행정이 아니었나 하는 것이 뜻있는 시민들의 생각이다. 하지만 자기 땅에 건축허가를 신청하는데 반려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항변하면 그 또한 맞는 말 같지만 애당초 이런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있던 자리라면 호텔 건축허가를 내주기 전에 문화계 인사들의 자문 정도는 받았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우리들이 수영 후에 몸을 뒹굴며 놀던 백사장 위쪽에 플라타너스나무와 버드나무가 어우러져 있었는데 이곳에 자연 대마가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허기야 우리들이 이곳을 헤매고 다닐 무렵에는 대마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때였으니까 몰랐던 것이 당연했다.

1970년대에 성남동에 있던 목신고고클럽에 “블루노트”란 외국인 벤드가 와서 생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이중에 마크라는 말썽꾸러기가 있었다. 마크는 울산을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필자가 이곳 용금수가 있는 태화강으로 데리고 간 적이 있었다. 그후 마크는 시간만 나면 이곳으로 놀러가곤 해서 수영을 즐기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는 이외의 사실을 고백했다.

그는 처음 이곳을 왔을 때 숲속을 걷다가 대마군락지를 발견했었다는 것이었다. 그후 그는 이곳을 비밀스럽게 자기 혼자만 알고 한번씩 와서는 대마잎을 채취해서 그 잎을 말려서 대마를 피워왔던 것이었다.

“우아 형님 그곳 대마가 아주 양질의 대마인데 깜빡 죽입니다.”하며 자랑을 늘어놓는 마크의 가슴을 주먹으로 몇 대 쥐어박으며 “잡히면 끝났다 이 자식아!”하며 두번 다시 그 근처에 가지 말라고 호통을 쳤지만 내 예측엔 그가 울산에 머물던 날까지 그 공짜 대마의 유혹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태화강가의 야생대마를 따서 피우며 울산에 고고 열풍을 일으키며 한동안 울산 젊은이들의 우상으로 군림하다가 떠났다. 이젠 그들도 50대 후반의 나이가 되었을 텐데 어디에서 흘러간 옛 재즈에 묻혀 살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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