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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우
기억조작
기사입력: 2005/11/19 [15:32]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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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우 본지 논설위원

기억은 사람의 정신세계 속에서 강하게 왜곡되기도 하며 때로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그리고 집단의 무의식을 반영하는 가공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기억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하고 집단 간의 공유되기도 하지만 자신의 자의식을 지탱하기 위해 형성되어간다.
 
기억은 시간과 공간의 전반적인 윤곽 파악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직접 체험했거나 다른 사람들의 기억을 빌려서 정보를 얻은 공간과 시간으로 정신적인 지도가 만들어지고 그 지도는 점차 갱신되는 과정 속에서 기억과 환상이 어울려져서 왜곡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이해관계가 형성되면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만큼 집착하거나 뻔한 거짓말을 하게 되는데 사람의 정체성은 기억으로부터 만들어지기에 때론 실제로는 없었던 현상도 만들어내고 어두웠던 과거의 환경을 아름답게 포장도 하여 미화된 자기를 만들어간다.
 
믿을 수 없는 이 자의식이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에 사람들은 다중의 인격이 나에게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다.
 
기억과 그 기억의 왜곡이 만드는 현실 앞에 존재 확인을 하고자 “정말 나는 누구인가”를 자신에게 묻지만 자아 정체성 혼란에 빠져 허덕이다가도 곧 현실에 안주하게 된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다시 쓰여진다.”는 말처럼 기억이 쉽게 변조되고 왜곡되어 우월한 위치에 놓인 것을 따라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강력하게 패러다임화 하게 된다.
 
정치권에서 정권말기에 쓰는 용어 중 레임덕(LAME DUCK)이란 단어가 있는데 권력의 내리막길을 그렇게 쓴다. 무소불위의 권력에서 왜 내리막길이 생기는걸까?
 
사람들의 기억속에 권력이 끝나간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브레이크가 없는 차처럼 내달리던 권력은 다른 후보를 찾아가므로 강한 자에 아무런 적개심이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는 현실왜곡이 무의식적으로 인정되어지기 때문이다.
 
얼마 전 수사기관에서 고소인 4인 피고소인 1인의 조사과정에서 4인의 주장이 자신의 이익과 합치된 부분에서 동일한 소리를 내는 모습에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사람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 양 한 마리를 어깨에 메고 성전을 향해 가는데 강도 3인이 그 양을 뺏기로 모의를 하여 한 꾀를 낸다.
 
성전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사람에게 강도가 “성자여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물으니 “성전에 제사를 드리러 간다.”고 우쭐되며 말하니 “성전에 제사하러 가는 분이 개를 왜 메고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화를 내면서 “양을 보고 개라고 하는 당신이 정신이 이상 하다”고 지나쳐 가는데 한참 후에 또 한사람 나타나 성자여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다.
 
성전에 제사 드리려 간다고 하니 깜짝 놀라서, 웬 개를 메고 가느냐고 호들갑을 떤다. 그래서 자신이 메고 있는 양을 몇 번이나 쳐다보다 고개를 흔들면서 다시 길을 간다.
 
한참을 가서 이번에는 거룩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사람이 성자여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성전에 제사 드리러 간다고 하니 화를 내면서 개를 메고 어떻게 성전에 가느냐고 야단을 친다.
 
제사 드리러 가던 사람이 자신이 메고 있는 양을 쳐다보다가 양을 내려놓고 오던 길을 되돌아 달려간다. 양 한 마리를 얻은 강도들은 신이 나서 웃는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확신이나 자아 정체감이 믿을 것이 못 되는 것이며 암시에 따라 사람의 본성이 맹목적으로 따라 갈 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역사는 합리적이지 않다. 그러면서도 역사는 그 자체가 진실이라고 여겨지기에 전통을 주장하지만 전통이라는 것이 인위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진실이라고 하는 기억은 머릿속 어딘가에 저장돼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 관점을 현재의 기대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발생할 수 있는 경험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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