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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재발견
부여박물관 유인궤 승전 기념비 눈길 끌어
의자왕 아들 부여융 비편도 패전국 백제 슬픔 보여줘
기사입력: 2008/08/15 [09:22]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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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 편집이사
  
유인궤 승전 기념탑은 현재 부여 박물관에 있다.  유인궤는 고종 때 백제를 침공한 당나라 장수로 백제 멸망 후 잠시 웅진도독을 지내기도 했고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침공해 고구려를 멸망시켰던 장수이기도 하다. 이후 요동도 부대 총관을 지낸 후 측천 무후시대에는 높은 벼슬에 오르기도 했다. 유인궤 승전기념탑은 당초 부여 박물관이 부소산성에 있을 때 박물관 마당에 놓여 있었다. 그러데 요즘 부여 박물관에 오는 사람들은 이 비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탑이 박물관 뒷들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비는 부여박물관 정문에서 박물관 건물로 들어가다 보면 왼편으로 관리실이 있는데 이 관리실 뒤에 있다. 건축물 안에 서 있는 이 비은 규모는 크지만 앞뒤 글자는 모두 마모가 되어 식별이 어렵다. 박물관 관계자들에게 "역사적으로 이처럼 귀중한 비석을 왜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보기 힘든 구석에 세워 두었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백제가 당나라에 의해 멸망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것이 교훈이라고 생각할 때 백제의 멸망을 이런 방법으로 숨기려는 것은 잘못이다.
  부여 박물관에서 당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유물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낙양 북망산에서 가져다 놓았다는 부여융의 비편이다.
  부여융은 의자왕의 아들로 의자왕 4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나 백제가 의자왕 때 멸망하는 바람에 왕이 되지 못하고 대신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당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백제 인들을 달래기 위해 부여융을 당으로 데리고 가 융성한 대접을 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 서안에서 가까운 낙양의 북망산에 묻고 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최근 당시 비편으로 보이는 돌이 발견되어 부여 박물관에 옮겨 전시되고 있다.
  이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의자왕의 능 역시 아들 부여융이 묻힌 인근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의자왕의 능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 흔적을 발견하지 못했다.
  건릉은 서안에서 서북쪽으로 80km 지점에 있다. 서안에서 차로 평원을 달리다 보면 허허 벌판에 2개의 작은 산봉우리처럼 솟은 산지가 보이는데 이곳이 바로 건릉이 있는 양산(梁山)이다. 능으로 올라가는 좌우 들판에는 노란 유채꽃이 아름답게 피어있다.
  당나라 능으로는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이 능 주위로는 2중의 성곽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또 내벽 성벽 6천m, 내성 면적 2백40㎡가 되었고 남쪽에는 주작청, 북쪽에는 현무문, 동쪽에는 청룡문, 서쪽에는 백호문이 있었다고 한다. 능으로 올라가는 사마도(司馬道)에는 석각과 고종, 측천무후의 공덕비 그리고 60여개의 석인상이 있다. 석인들은 모두 관을 쓰고 옥패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석인들의 끝에는 머리가 깨어진 채 몸통만 남아 있는 석마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 석상들은 고종의 장례식 때 조문을 온 인근 민족들의 사신을 조각한 것으로 모든 석인상에는 국명과 관직,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몸체가 크게 훼손되어 글씨를 알아 볼 수 없다.
  석각들의 행렬이 끝나는 지점에는 고종의 공덕을 기리는  술골기비'와 측천무후의 공덕비  무자비'가 있다. 고종의 비는 측천무후가 찬하고 중종이 해서체로 썼다. 특이한 것은 무후의 비에는 아무런 글씨가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다.
  첫째는 무후가 너무 높고 큰 자신의 공덕을 표현할 글을 찾지 못해 비문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측천무후가 죽은 후 황제의 자리를 빼앗은 자신의 경력을 넣지 않고는 비문을 쓸 수 없었기 때문에 이를 두려워 한 신하들 중 비문을 쓰려는 사람들이 없어 비워두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측천무후가 죽을 때 후세 사람들이 알아서 쓰라고 해 비워두었다는 설이 있나 하면 측천무후에 의해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아들 중종이 어머니에 대한 한이 남아 공덕비를 써주지 않았기 때문에 무자비로 남아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이 비는 그동안 송과 금을 거치면서 누군가가 비석에 글자를 새겨 넣어 지금은 무자비가 아닌 유자비가 되어 있다.
  특히 금나라 때  여진문자(餘塵文字)로 쓴 낭군행기(朗君行記)는 여진 문자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건릉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영태공주 묘와 의덕태자 묘 그리고 장희태자 묘가 있다. 의덕태자와 영태공주는 중종의 자녀로 측천무후의 노여움을 사 죽었다.
  측천무후는 정치를 하는 동안 남성 편력도 복잡했고 때때로 도가에 기울어져 혼미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또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중종과 예종 등 두 아들을 폐위시키는 등 잔인한 행동도 했다. 이를 안 고종은 측천무후를 폐위 시키려는 노력을 했지만 이때는 이미 권신들이 모두 측천무후편이 되어 이를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이 때 어머니에 의해 자신의 자식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아야 했던 중종의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 하는 것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 중종은 705년 장간지가 병고에 시달리는 측천무후를 협박해 다시 황제가 되었다.
  영태공주 묘는 발굴을 시작했을 때 이미  도굴을 당해 약간의 당삼채와 도기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묘 내부에는 당시 궁정의 모습을 미루어 생각할 수 있는 궁녀도가 남아 있어 당시 궁중 사회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장희태자 역시 측천무후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이 태자의 무덤에는 신라 사신이 그려져 있는 영빈도가 있어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는데 이 역시 도굴로 색깔이 바래고  지워져 당시 생활을 추정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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