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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재발견
우리역사와 관계 깊은 고종과 측천무후 능
고구려와 백제 멸망시킨 소정방, 유인궤도 이 무렵 활동
기사입력: 2008/07/24 [14:57]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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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 편집이사

  서안을 찾는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지나치기 쉬운 관광지가 있다. 건능은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과 그의 부인 측천무후가 합장된 능으로 우리 역사와 관계가 깊다. 따라서 우리나라 사람이면 꼭 둘러보아야 할 능이다. 그러나 이 능은 서안 도심에서 거리상 멀어 관광 일정에서 빠지는 경우가 많다.
  서안에는 당나라 유적지와 유물이 많지만 우리나라 여행사의 경우 서안에 머무는 시간을 하루 이틀 정도로 잡기 때문에 건능은 물론 여산도 빠뜨리곤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건능을 찾아야 하는 것은 이곳에 묻힌 고종과 측천무후가 우리역사와 관계가 깊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를 보면 여자들 중 미모를 이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은 많다. 은의 포사와 서주의 달기, 당의 양귀비 등이 이들이다. 또 청나라 말기에 나타났던 서태후는 실제로 황제보다 더한 권력을 쥐고 국정을 흔들었다. 그러나 이들 중 자신이 황제에 오른 사람은 없다.
   측천 무후가 황제가 된 요인 중에는 이치 고종의 무능이 큰 작용을 했다. 그러나 측천 무후의 정권에 대한 야망 또한 요인이 되었다. 고종 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하고 성격적으로 우유부단해 황제가 되기에는 모자라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신하들이 보기에는 이런 인물이 황제가 되면 자신들이 정치에 관여 할 수 있어 이치를 황제로 앉혔다.
  고종은 특히 간질병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빌미로 측천무후가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대리 정치를 한 측천무후였지만 고종에 비해 정치를 월등히 잘했다. 따라서 고종이 죽은 후에는 그의 아들 중종과 예종을 황제로 올린 후 결국 이들을 실각 시키고 자신이 황제가 되었다.
  한반도에서 신라와 쟁패를 다투었던 백제와 고구려가 당 나라 군에 의해 멸망된 것도 고종과 측천무후 때다. 특히 고구려의 멸망은 우리나라로 보면 통탄스러운 일이지만 당으로 보면 오랜 숙원을 이룩한 것이 된다.
  중국은 기회 있을 때 마다 고구려를 침략했지만 동북의 강자 고구려를 물리칠 수 없었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치다가 스스로 멸망을 초래했고 당 태종 역시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안시성 싸움에서 패전의 눈물을 삼키면서 돌아서야 했다.
   그런데 고종과 측천 무후가 고구려 점령의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측천무후는 이처럼 국토를 넓히고 외치만 잘 한 것이 아니다. 비록 그의 등극은 불법이 되어 구 귀족에 대한 냉혹한 숙청과 심지어 그의 핏줄마저 죽이는 결과를 가져 왔지만 인재 등용에 힘쓰고 황제권을 강화하는 등 내치도 잘 했다.
  측천무후는 중종과 예종을 황제로 등극시킨 후 이들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나라 이름을 주(周)로 고쳐 새로운 한 시대를 열려고 했다. 또 자신에게 반대하는 신하들을 탄압하고  승려들과 추문을 일으켜 세인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인재를 등용시켜 사회를 안정 시켰다.
  따라서 그는 6대 황제 현종이 당나라 전성기를 이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현종은 양귀비에 빠져 정사를 멀리 하기 전 까지만 해도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는데 이 기반을 측천 무후가 마련했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소정방과 유인궤 장군이 활동했던 때도 측천 무후가 당을 다스리고 있을 때였다.
  현재 부여에는 고종과 측천무후가 보낸 소정방과 유인궤의 전승을 기념하는 글귀와 비가 있어 부여를 찾는 우리들을 쓸쓸하게 한다.
  소정방의 전승을 기념하는 글은 부여 정림사지에 있다.
   정림사지 석탑은 백제가 멸망해간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 채 1천400 여 년 동안 버티어 왔다. 이 탑은 혼자 쓸쓸히 서 있는 모습 자체가 백제 망국의 한을 안고 있는 것 같아 보는 이들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이 탑을 보면 탑도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운명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탑이 망국의 땅인 백제에 세워져 백제의 멸망을 보았다는 자체가 운명적이다. 이 탑이 세워졌을 때만 해도 문화적으로 화려했던  백제의 수도 부여에는 적지 않은 탑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의 멸망과 함께 이들 탑들이 모두 사라져 갔지만 이 탑이 살아남았다는 자체가 운명적이다. 더 더욱 운명적인 것은 백제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이 탑에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대장 소정방이 자신의 공을 새겨놓았다는 것이다.
  이 탑의 1층 옥신석에는 사방 당나라 대장 소정방의 공을 기리는 글들이 새겨져 있다. 이들 글들은 정체가 아닌 흡사 낙서처럼 써여져 있다. 이것은 아마 이 글을 쓸 때만 해도 백제 부흥운동이 계속되고 있어 글을 새긴 사람이 시간적으로 쫓기어 이렇게 글을 휘갈겨 놓았는지도 모른다.
  다행스러운 것은 정림사지에 소정방의 전공을 새긴 사람이 백제인이 아니고 당나라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기록에는 이 글이 백제가 망한 660년에 새겨졌는데  당시 나당 연합군의 일원으로 당에서 온 군인들 중 문사였던 하수량(賀遂亮)이 글을 짓고 권회소(權懷素)가 새긴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림사지 탑은 우리나라 다른 탑과 마찬가지로 그동안 적지 않은 수난을 겪었다.
  우선 백제가 망한 후 통일 신라 시대에는 적지의 탑으로 업신여김을 받았을 것이다.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시대에도 이 탑은 불교유적이라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홀대를 받았을 것이다.    이런 홀대는 탑 주위에 담이 만들어지고 사역이 조성될 80년 까지도 계속되었다. 이 탑이 백제의 유적으로 세인들의 눈을 끈 것은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이전에는 이 탑이 서 있었던 곳은 허허 벌판이었다. 따라서 봄바람과 가을비에 시달렸고 이웃 초동들이 오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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