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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의재발견
고향 그리는 우수 시에 잘 나타나
과거에도 여러 번 낙방 시 통해 시름 달래기도
기사입력: 2008/07/17 [13:04]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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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 편집이사
▲     사천성 성도는 평생을 불우하게 살았던 두보가 잠시나마 마음편히 지냈던 곳이다.
 
 
오늘날 50~60대 사람들이 두보와 가까워 진 것은 대부분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두시언해(杜詩諺解)'를 통해서 일 것이다.
  이 책은 두보가 안록산 난을 피해 중국 전역을 돌면서 지은 시를 고문과 함께 잘 풀이해 놓았다.
  이중  오언절구(五言絶句)'에 나오는 시는 아래와 같은데 이 역시 고향을 그리는 두보의 우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시는 그가 53세 때 성도에서 지은 것이다.
  江碧鳥逾白/山靑花欲燃/今春看又過/何日是歸年
  강이 푸르니 새 더욱 희고/ 산이 푸르니 꽃이 불붙는 듯하다/올봄은 또 이렇게 지나가노니/ 언제나 돌아가리오
 
  이백이 평생을 신선처럼 살다가 죽은데 비해 두보는 전란의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어려운 삶을 살다가 간 시인이다. 두보가 태어난 곳은 낙양에서 동쪽으로 60km 떨어진 공현이라는 고장이다. 이 마을은 6세기에 만든 석굴이 유명하다.
  두보 집안은 대대로 지방 관리를 지내 온 호족 출신으로 그의 부친은 각지의 지방관을 맡으며 현령이 되기도 했다. 두보는 현종 즉위 원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가 30살이 될 때까지만 해도 당나라는 현종 통치의 전반기가 되어 태평성대 했다. 현종 전성기였던 이때까지 두보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20살이 되었을 때 중국 전역을 돌아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여행을 즐겼던 것 같다. 실제로 중국 각지에는 그와 연관된 고장들이 많은데 이것은 그가 어릴 때부터 여행을 많이 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여행을 하지 않을 때는 고향에 머물면서 낙양으로 나아가 과거에 응하기도 했지만  여러 번 낙방했다.. 당시 그가 응시했던 과목은 진사과로 시와 문을 중시하는 이 시험에는 우수한 인재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나중에 나타나는 그의 시를 보면 우수가 깊은데 이것은 그가 과거 시험에서 겪은 이런 불운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백이 술에 취해 있으면서도 궁궐에서 현종의 부름을 받아 시를 지을 때 두보도 과거에 낙방한 시름을 달래면서 장안에 있었다.
  과거 낙방으로 뚜렷한 돈벌이가 없었던 그에게 가족은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었다. 따라서 그는 정치가 어지러워지면서 물가가 치솟자 가족들을 봉선현으로 보내었다. 안록산 난은 그가 가족을 찾아 봉선현으로 갈 때 일어났다.  이 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이때 장안에 살았던 사람들이 난을 피해 앞 다투어 봉선현으로 갔고 두보 역시 피난민 대열에 있었다.
  그가 봉선현으로 가고 있을 때 현종이 아들 숙종에게 황제 자리를 양위했는데 그는 새로운 황제 아래서 일 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그는  반군에게 잡혀 장안으로 붙잡혀와 유폐되고 말았다.
  이백이 현종의 전성시대 그의 곁에 머물면서 시를 지으며 부귀영화를 누렸던 것에 비하면 대단히 불우한 운명이다. 
  그가 장안으로 압송되었을 때 이미 반군들이 스쳐간 장안은 옛 장안의 모습이 아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비록 붙잡힌 몸이었지만 큰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장안 생활이 자유로웠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여가가 날 때마다 성 밖으로 나아가 시를 쓰곤 했는데 이들 시들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그의 대표시로 알려진  춘망'도 이 무렵 썼다.
  장안에서 한동안 유폐되어 있었던 그는 결국 장안을 탈출해 숙종이 있었던 영무로 가게 되고 이곳에서 관원이 되었다. 이후 안록산이 그의 아들 안경서에게 살해되는 바람에 숙종과 두보는 장안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두보는 이때 정식 관원이 되어 조정에 나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안정된 생활도 잠시 뿐이었다. 중앙에서 일 년 정도 일한 뒤 그는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지방으로 간 지 일 년 정도 되었을 때 큰 기근이 이 지역을 덮쳐 두보는 관직을 그만두고 다시 서쪽으로 떠나야 했다. 이때 가족도 함께 했다.
  감숙지방을 지나 사천성 성도에 닿은 것이 48세 때였다.
  그가 성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곳에 먼저 피난을 왔던 현종은 이미 장안으로 돌아가고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5년여 동안 비교적 편안한 생활을 했다.
  이후 고향을 찾아 남으로 내려오게 된다. 이때는 현종과 숙종이 물러나고 내란도 끝나  대종(代宗)의 시대가 되어 있었다.
  그는 양자강을 타고 남으로 남으로 내려와 고향 공현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고향을 찾기 전 병이 들어 770년 59세의 나이로 죽었다.  
   현재 성도에는 두보 초당이 있다. 초당은 그가 성도에 있는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두보는 성도에 있는 동안 무려 240여 편의 시를 지었다.
  현존하는 초당은 물론 두보가 살았을 때의 집은 아니다. 창건 당시 건물은 그가 성도를 떠난 후 곧 없어졌고 북송 시대에 초당이 있었던 곳에 사당을 건립했다.
  현존하는 건축물은 1811년 청나라 시대 재건한 것이다. 초당 중심부에는 시사당이 있고 양편으로 진열장이 있다. 진열장에 전시된 내용물은 두보의 성장과정과 두보 시가 현대시에 미친 영향을 담고 있다. 이외에도 두보 박물관이 있는데 이 박물관에는 두보 연구에 필요한 사료가 소장되어 있다.
  초당 안으로 들어서면 대밭이 있는데 이곳에는 차를 마실 수 있는 건물과 테이블이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글 중에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글이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이 70을 넘기는 것이 쉽지 않다는 이 글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 두보다. 그는 시  곡강'에서 이 표현을 했고 이것이 명귀가 되어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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