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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독도를 생각하며 대마도를 읽는다
[특별기획] 독도를 생각하며 대마도를 읽는다.18 - 日, ‘조선군 1500명을 죽이고 배를 불살랐다’ 왜곡
신들이 일본을 지켜주고 있다는 신국사상(神國思想) 더 짙어져
기사입력: 2024/03/01 [12:04]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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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모근 기자

 

독도는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나라 영토이다. 일본이 억지를 부리면서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대마도정벌은 고려 및 조선 왕조에서 여말선초 시기 한반도를 침입하던 왜구의 주요 기항지 가운데 하나인 쓰시마 섬을 토벌했던 전쟁을 말한다. 

정벌은 총 3번 있었는데, 일반적으로는 조선 세종 1년(1419)에 단행된 제3차 대마도 정벌을 칭한다. 일본에서는 당시 일본 연호를 따서 오에이의 외구(応永の外寇)라고 부른다. 
울산여성신문에서는 일본의 억지주장을 일축하면서 우리 선조들의 대마도정벌을 통해 그 의미를 짚어 보고 대마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기획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황송하옵게도 아뢰옵니다. 6월 20일 몽골, 고려 모두 협동하여 군세 500여 척이 대마도에 접근해 왔습니다. 그 섬을 빼앗으려고 하는 동안은 우리들과 다자이노 쇼니의 군세만이 바로 대마도의 포구에 도착하여 낮과 밤사이에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동안 죽은 적의 숫자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전투가) 이미 몹시 어려워졌을 때에 (규슈의) 9개 지역의 군세를 모았습니다. 같은 달 26일 각각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안부를 알 수 없는 전투를 치르는 동안 이국의 군병 3천7백여 명을 죽이고 베어버렸습니다. 그 외에는 숫자를 알 수 없습니다. 

 

전체 해상에 떠있는 것 적의 함선은 1300여 척이었습니다. 수군에게 명령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벌인 곳곳의 전투, 또는 미처 배에 타지 못하고 해상에 가라앉은 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는 동안 한창 전투가 진행되는 가운데에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이변이 일어났습니다. 적의 배에서 비와 바람이 진동하였습니다.

 

천둥이 치고 싸락눈이 내렸습니다. 추위로 손이 얼어 무기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얼어 죽는 자 그 수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기이한 현상은 전투가 어려울 때에 어디로부터 인지 알 수 없는 3종류의 비단의 깃발을 단 큰 배 4척이, 대장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여인이었습니다. 그 힘은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몽골의 배에 옮겨 타 군병 300여 명을 손으로 들어 바다로 던져버렸습니다. 대장은 몽골의 남자와 그 외에 죄가 있는 자 28명을 즉시 베어버렸습니다. 남은 7명은 위의 뜻에 따라 남겨두었습니다. 

 

27일 한밤중에 이국의 남은 병사들도 모두 물러갔습니다. 몽골군은 전사했다고 소문이 났지만 그것은 아직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 외의 적선도 7월 2일 모두 물러갔습니다. 이와 같이 급속하게 종결된 것은 모두 신명의 위력에 의한 것입니다.”

 

 

이 문서는 7월 15일 자 「탐제모치노리(探題持範)」의 이름으로 작성된 것인데 당시의 탐제는 모치노리가 아니라 시부가와 요시토시(渋川義俊)이며, 내용적으로도 다자이(太宰)의 쇼니(少弐)는 물론, 1419년 사건에서 규슈탐제가 대마도에 협력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적군의 배에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추위로 인해 손이 얼어붙었다는 기록 역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즉 이 주진장의 출처는 불분명하며, 그 내용도 전황을 정확하게 알리는 것이 아니라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은 다자이의 쇼니와 탐제의 공을 강조하고, 기이현상을 보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다만 태풍과 관련해서는 대마도를 공격한 조선군이 태풍이 올 시기라는 점을 감안하여 후퇴했다는 기록만이 확인될 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배가 나타났고 그 배의 대장은 여인이었으며, 이러한 싸움의 종결이 신위에 의한 것이라는 점을 사실이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이고 여기에 등장하는 여인에 대해서도 신공황후(神功皇后)라는 설이 제시되고 있다. 

 

다른 일본 사료인 『조선통교대기(朝鮮通交大紀)』에선 조선군 1500명을 죽이고 배를 불살랐다고 나오나 마찬가지로 전공을 과장한 것이다.

 

어찌 됐든 이러한 인식에 기초해 일본에선 이 전쟁을 승전으로 여겨 신들이 일본을 지켜주고 있다는 신국사상(神國思想)이 더 짙어졌으며 노가쿠(能楽) 「백락천(白楽天)」의 제작에까지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근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렇게 과장된 승전보가 일본 막부에선 되려 조선이 일본 침공을 한다고 난리가 나는 계기가 되었다. 

 

1420년 일본에 회례사로 파견된 송희경이 막부 관료들에게서 조선이 일본 정벌을 명나라와 준비하냐는 질문에 당황해하며 그런일이 없다고 하였다. 

 

진실은 쇼니 미쓰사다가 올린 보고에 자신이 상대한게 명나라 1천척, 조선 3천척이 언급되었기 때문. 덕분에 송희경은 이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야 했다.

 

송희경 본인도 원래는 회례사로 일본에 방문하려 했는데 쓰시마에서 막부가 조선의 침공에 대해 걱정하는 것을, 교토 근처에선 쇼니 미쓰사다의 왜곡 보고를 들어서 일정에도 없던 오해를 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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