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호는 18세에 춘당 김수악 명인을 은사로 소리와 악을 배웠으며, 상징민속학을 전공했다. 해병대 484기이며, 2014년 1월 1일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4호 국내 지신밟기 예능 보유자로 선정되어 인간문화재가 됐다.
손심심은 17세에 문장원, 양극수, 김동원 명무를 은사로 동래양반춤, 동래할미춤, 동래학춤을 시작하였고, 전통무용을 전공했다.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동래야류 전수조교이고 동래학춤 이수자이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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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바다에 둘러싸인 반도 땅으로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있고
강과 접하는 개펄이 많아 소금이 구하기 쉽고, 수산 자원이 풍부한 곳이었다.
그래서 소금에 절여 삭힌 젓갈로 탄수화물 위주의 식단에서 부족한 단백질과 아미노산, 미네랄을 해결하였다.
소금과 시간과 항아리와 싱싱한 재료들이 연합으로 만들어 낸 우리네 젓갈은 어머니와 그 어머니들이 이룩해 놓은 경험과 기억의 위대한 유산이었다.
젓갈에 관한 첫 기록은 삼국사기 신문왕조에 처음 나타났다. 신문왕 3년(683년)에 왕이 혼례를 올리는데 왕비 김씨를 맞이하는 폐백 품목에 쌀, 술, 기름, 꿀, 장, 메주, 포와 함께 젓갈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그 훨씬 이전에 옹기의 발전과 함께 젓갈이 기본 식품으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냉장 시설이 없었던 고려, 조선 시대에는 소금 외에도 술, 엿기름, 산초, 누룩, 찰밥 등의 재료를 섞어서 오늘날보다 훨씬 많은 종류 수의 젓갈이 있었다.
통째로 소금에 절이는 멸치젓, 까나리젓, 정어리젓, 밴댕이젓, 오징어젓, 자리젓, 꼴뚜기젓, 멍게젓, 낙지젓, 갈치젓, 전어젓, 전복젓이 있었고, 알, 창자로 소금에 절이는 명란젓, 창난젓, 성게알젓, 청어알적, 갈치속젓, 전어밤젓, 대구알젓 등이 있었다.
똑같은 조기젓이라도 작은 것은 황석어젓이라고 따로 불렀다. 그리고 똑같은 새우젓이라도 3∼4월에 잡힌 새우로 만든 춘젓, 5월에 잡힌 것은 오젓, 6월에 잡힌 것은 육젓이라 불렀고, 초가을에 잡힌 작은 새우는 자하젓이라 부르는 등 실로 다양한 새우젓이 있었다.
전라도에는 새우에 얽힌 재미난 욕도 있었다. 서남해에서는 이 새우가 어민들의 생존과 관련되는 중요한 산물이었다. 그런데 6월에 잡히는 새우는 새우만 올라오는데, 5월 사리 때 잡히는 새우는 그물에 새우뿐만 아니라 게, 오징어 같은 것들이 딸려 올라와 어부들을 귀찮게 했다.
그래서 이러한 새우외의 하찮은 놈들을 '오사리 잡것들’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편 그 지역에서만 나는 특산물 젓갈도 생겨났다. 서해안은 전라도에만 나는 민물새우로 만든 토하젓, 충남 서산에서만 나는 어리굴젓, 충남 서천에서만 나는 초여름 작은 새우로 만든 곤쟁이젓, 군산에서만 나는 새우알젓이 있었다.
그외에 강원도와 함경도에서 생산하여 수라상에 올라가는 귀한 연어알젓이 있고, 제주도에서 전복 내장으로 담근 게웃젓과 자리돔으로 담근 자리젓, 울릉도의 반디오징어젓, 꽁치젓, 통영 뽈라구젓 등 지역색이 뚜렷한 젓갈도 있었다.
젓갈의 가장 큰 쓰임새는 역시 김치를 담을 때였다. 우리나라는 지방마다 특화된 젓갈로 김치를 담았다. 황해도는 인근에서 많이 나는 까나리젓, 조기젓, 새우젓을 많이 썼고, 평안도는 조기젓, 새우젓을 주로 썼다.
함경도 지역은 새우젓이나 멸치젓은 약하게 썼고 소금으로 김치를 담갔다. 거기에 동해안 지역은 배추에 동태나 가자미를 고춧가루로 버무려 넣어 김치를 담았다.
서울의 마포나루는 예부터 서해안에서 나는 젓갈의 집산지로 주로 새우젓, 조기젓, 황석어젓 등으로 여러 김치를 담갔고, 충청도와 강원 내륙지역은 서해에서 남한강을 타고 내륙 수로로 올라오는 조기젓, 황석어젓, 새우젓, 까나리젓으로 담백한 김치를 많이 담가 먹었다.
강원도와 경북 동해안은 멸치젓과 새우젓을 주로 썼고, 꽁치젓을 쓰기도 했다. 이 지역은 싱싱한 동해안의 오징어, 가자미, 명태를 이용한 김치가 발달하였다.
경상도 남해안은 따뜻한 기후로 인해 산패가 빨라 진행되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도 소금간이 센 멸치젓과 마늘과 고춧가루가 많이 들어가 맵고 짠 김치가 특징이었다.
[출처] 대포댁의 레시피 젓갈4|작성자 김준호손심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