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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치
"포니 정" 자동차 산업의 큰 별이 졌다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 타개, 한국 자동차산업 선구자 외길 32년
기사입력: 2005/05/23 [10:15]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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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건용

한국 자동차 산업의 큰 별이 떨어졌다. 32년간 자동차 외길 인생을 살아온 故 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77)이 21일 오후 타개한 것이다. 한국 자동차 산업의 역사이자 산 증인인 고인이 세상을 떠남에 따라 업계는 슬픔이 가득하다. 지난 2000년 폐암 진단을 받았던 정 명예회장은 최근 감기로 잠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퇴원 후 폐렴 증세가 다시 악화되면서 서울 풍납동 아산중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으나 결국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故 정세영 명예회장의 닉네임은 "포니 정"이다. 이 닉네임이 붙여진 것은 지난 1976년. 현대가 1974년 "국민차" 포니 승용차를 탄생시켜 1976년 본격적으로 수출하는 등 포니 신화를 만들어낸데 일등공신 역할을 해서 붙여진 것.
이후 정 명예회장은 현대차의 산파 역할을 하면서 지난 1999년까지 32년간 자동차 외길 인생을 걸어왔다. 99년 폐암 진단을 받고 미 MD 앤더슨 암센터에서 치료를 받은 그는 현대차를 떠나 현대산업개발을 경영해왔다.
"대학강단에 서는 것"이 꿈이었던 해외 유학파
정 명예회장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초창기 어려웠던 시절, 결정적 도움을 준 장본인 중 하나다. 또한 둘째 형인 고 정인영 한라그룹 회장이 현대그룹으로부터 독립하였을 때도 유일하게 현대그룹에 남아 정 창업주의 옆을 지켰다.
재계에선 정 명예회장에 대해 경영에 뛰어난 능력을 갖췄던 인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실제 그는 정 창업주 형제들 중 학력이 가장 높다. 53년 고려대 정외과를 졸업한 후 미국 마이애미대학에 유학,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고 귀국했다.
원래 정 명예회장의 꿈이 기업가는 아니었다. 교수가 꿈이었다. 실제 그는 귀국 당시 대학 강단에 설 계획을 갖고 추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던 그가 기업가로 방향을 다시 잡은 것은 정 창업주의 집요한 권유 때문이다.
결국 정 창업주의 권유에 따라 기업가로 변신한 것은 1957년 12월의 일이다. 현대건설 상무로 기업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딛은 정 명예회장은 해외공사 수주활동에서 큰 실적을 올리며 현대건설이 정상을 차지하는데 공헌했다. 미국 유학에서 익힌 뛰어난 영어실력과 타고난 국제감각이 단단히 한몫을 한 것이다.
뿐만 아니다. 해외 유학파답게 첨단적인 경영기법을 도입,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도 했다. 이같은 실적을 인정받은 그는 현대자동차가 탄생한 1967년 초대 사장직을 맡아 최고경영자로 나서게 되었다. 이 때부터 32년 자동차 외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첫 작품은 68년에 탄생했다. 현대자동차 1호차인 "코티나"가 그것. 이후 74년 국내 처음의 고유 모델인 "포니"를 개발해 토리노 국제모터쇼에 참가, 세계 자동차업계를 놀라게 했다.
76년부터 포니를 본격적으로 생산했고, 81년에는 "포니2"를 선보였다. 84년에는 포니2를 캐나다에 처음 수출했고 이듬해 일본 등 외국 유명 업체들을 누르고 캐나다에서 외국 자동차 부문 판매실적 1위를 기록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뉴욕타임즈 "미국 자동차시장에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
정 명예회장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86년부터다. 당시 그는 미국시장에 진출, 막강한 라이벌들과 어깨를 견주었다. 포니엑셀로 승부를 건 결과 판매실적이 16만5천대에 달했다. 86년말 기준으로 미국시장에 수출한 "포니"만도 30만대 이상이다. 여기서 거둬들인 매출은 1조8천억원. 이 공로로 86년 12월 30일 수출의 날에 금탑 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경제 전문잡지인 "포츈"이 "미국 역사상 가장 잘 팔린 10대 상품"의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뉴욕타임즈는 그에게 "포니 정"이란 별명과 "미국 자동차시장에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평을 선사했다. 한마디로 경영 능력을 크게 인정받았던 순간이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의 진가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87년 2월 현대그룹 제2대 회장직에 취임한 그는 91년에 국내에선 처음으로 독자엔진과 트렌스미션을 개발, 현대자동차의 기술 독립을 선언했다. 국내자동차 산업의 세계화를 이끌기도 했다. 97년 세계 최대의 상용차 공장인 전주공장 건립과 터키공장, 인도공장 준공이 그것이다.
첨단적인 경영기법을 도입해 왕성한 사업 의욕으로 그룹을 운영하는 것은 자동차 외길 인생을 접고 건설인으로 거듭난 99년에도 이어졌다.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인재 육성에 아낌없는 투자, 고객만족 경영을 위한 투명한 기업경영과 정도경영 실천, 자동차산업의 능률과 합리적인 사고를 건설업에 접목시키기 위한 선진경영 기법 도입 등이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정 명예회장의 인생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99년의 일이다. 폐암 진단을 받고 MD 앤더슨 암센터에서 치료를 받은 것이다. 또 지난 5월 14일께 감기 증상을 호소하며 병원을 찾았다. 잠시 병원에 머문 그는 자택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증세가 악화되면서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혼수상태에 있던 정 명예회장은 결국 눈을 뜨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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