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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
기사입력: 2013/03/27 [11:46]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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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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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純宗, 1874년(고종 11년) 음력 2월 8일(양력 3월 25일)~1926년 양력 4월 25일)은 대한제국의 제2대 황제이자 조선 왕조의 제27대 왕이다. 연호를 따 융희제(隆熙帝 : 재위 1907년~1910년)라고 부르기도 한다.

 성은 이(李), 휘는 척,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군방(君邦), 호는 정헌(正軒), 정식 시호는 순종문온무녕돈인성경효황제(純宗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아들이며, 고종의 장성한 자녀 중 유일한 적자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왕(李王)으로 불렸다.

 순종은 고종의 유일한 적자이자 장자로 명성황후 민씨 소생이며, 후사는 없다.
어려서부터 병약하였으며 일본인에게 매수된 내관이 그가 마시던 홍차에 독을 타서 건강을 잃게 했다.

 1907년에 고종이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등을 비밀리에 밀사로 파견했으나 헤이그 밀사 사건 실패 이후, 일본과 친일파의 압력으로 고종은 퇴위 요구를 받아 강제로 물러나 순종은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으며, 연호를 융희(隆熙)라 하였다.
 그러나 그를 정식 군주로 인정하지 않던 일부 세력은 그를 황제나 주상이라 부르지 않고 전각의 이름을 따서 창덕궁 전하라고 불렀다.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고종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태자로 영친왕 이은을 결정하였다.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과 이강은 졸지에 순종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
 즉위한 해인 1907년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대원왕(大院王)으로 추봉하였다.
 
 이 무렵 일본이 러일 전쟁을 통해 한반도에서 다른 식민지 열강 세력을 몰아내고 대한제국의 이른바 후견국을 자처하면서 한일 합방의 발판을 공고히 하였다. 여기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안중근에 의해 하얼빈에서 암살을 당하였다.
 한편 같은 해인 1909년 기유각서 사건으로 인하여 대한제국 황제 순종 임금의 실권은 제2대 조선 통감 소네 아라스케에게 박탈되고 순종 임금은 이듬해인 1910년까지 허수아비 임금의 신세가 되었다. 뒤이어서 제3대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대한제국의 실권을 쥐고 1910년 경술한일합방조약으로 대한제국 조선 왕조는 멸망으로 막을 내리고 말았다.

 1910년 순종은 한일 병합 조약에 공식적으로 서명할 것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순종은 조약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으며, 8월 22일 결국 당시 총리대신인 이완용이 이에 대신 서명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합병되었으며, 더불어 조선 왕조의 치세는 끝을 맺게 되었다. 이후 순종은 황제에서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거처하였다.

 1926년 4월 25일 5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으며, 능은 유릉(裕陵)이다. 그의 장례식에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3.1 운동처럼 확산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합작한 신간회가 결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순종이라는 묘호(廟號)는 1926년 5월 1일 이왕직 장관 민영기가 제안한 순종, 경종(敬宗), 성종(誠宗) 중 수망(首望)대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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