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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단상
‘앙드레김’ 을 아시나요?
기사입력: 2010/08/30 [17:38]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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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덕순 본지발행인
 
“앙드레김이 별세했대, 아니 나이가 얼만데 벌써?”

그의 죽음이 매스컴에서 알려지자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은 “벌써?” “아이고 이제 그의 느려터진 말도 못듣겠네...” 

74세 노령인 앙드레 김은 한국을 대표하는 남성패션디자이너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독특한 패션과 언어구사로 국민들에게는 친근한 대중적 인물로, 패션계의 젊은 인물로 가까이 있었던 것이었나 봅니다.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평가나 업적보다 국민들에게 더 친숙하게 사랑받고 호흡하고 있었다는 것이겠지요. 그런 그가 세상을 떴고 한국패션을 세계에 널리 알린 업적을 기려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습니다.

‘앙드레 김’ 하면 어떤 생각이 먼저 드시는지...?

하얀 분칠을 하고 짙게 눈썹을 그린 분장으로, 독특하게 디자인한 자신만의 흰색 복장을 한, 혀를 굴리는 특이한 발음으로 영어를 구사하는 남성디자이너로, 가는 곳마다 화려한 조명을 받는 유명인으로...

필자 또한 그 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고 알 수 있는 연이 없었기에 그냥 참 특이한 사람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 그리고 자신의 분야를 확고하게 지켜가는 분이라는 정도였지요. 그리고 세간에서 회자되는 앙드레 김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긴다고 했듯 앙드레 김처럼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함으로 한국인으로나 패션디자인으로나 본분을 다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의 삶과 족적에 대해 다시 한번 조망해볼 필요가 있을 듯해서 단상해봅니다.

한 개인의 삶 이전에 한국의 패션디자이너라고 하면 ‘앙드레 김’ 할 정도로 50년을 한 길만을 걸어왔습니다. 1960년 패션디자이너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대에 그는 복식학원을 다니며 디자이너로의 꿈을 키웠고 1962년 자신의 의상실을 열었지요.
 
물론 의상실을 열고 난 후의 여러 가지 일화들을 매스컴에서 보았지만 의상실을 알리는 데나 고객을 유치하는 데도 탁월한 아이디어로 유명 연예인을 내세우며 앙드레 김을 알려가더군요. 역시 앞서가는 마인드를 가지고 미개척분야를 개척해가는 선구자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년 여름 인도네시아 발리섬을 간 적이 있었는데 발리에서도 현지인가이드가 앙드레 김을 아느냐고 서툰 말로 물어와서 한국의 유명한 남성패션디자이너라고 했더니 자신은 앙드레김을 잘 알고 좋아한다고 말하며 몇 년 전 야외결혼을 많이 하는 발리의 한 공원에서 앙드레 김 패션쇼가 열렸는데 정말 많은 유명인들이 왔고 의상이 환상적이엇다고 침을 튀기며 ‘원더풀’을 연발하는 것을 보고 ‘애국이 따로 없구나. 이것이 애국’이라는 감동을 잠깐 받았습니다.

물론 전문분야에서는 그의 업적이나 위치에 대해서 평할 때 한국의 패션디자인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그에 대해 ‘앙드레 김’이라는 이름을 세계브랜드화시키지 못한 점, 세계에 널리 알려져 대명사화한 ‘앙드레 김’의 패션이 좀더 한국적인 미를 선보였어야 했다는 패션분야의 아쉬움, 패션쇼를 통해 이름만 너무 알린 것 아니냐는 비판도 합디다만 우리의 패션문화가 길지 않고 당시 국내의 현실을 감안할 때 세계에 한국을 알린 공로로 치자면 ‘앙드레 김’은 한국패션계의 선구자였음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세계속에 한국의 패션이미지를 심어준 애국자이기도 했습니다. 1930년대 암울했던 시절에 태어나 먹기도 힘겨웠던 시절에 입을 것을 생각했던 사람, 남성으로 감히 생각지도 못 할 미개척분야를 1960년 국제복식학원에서 공부하고 남성패션디자이너 1호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국패션을 이끌어온 시대를 앞선 선각자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패션을 세계에 나가 알린다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시대에 그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파리에서 컬렉션을 개최했고 미국 워싱턴에서 국제의상발표회를 가졌고 이탈리아와 프랑스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습니다.

세계인들이 한국을, 전쟁을 겪은 가난한 나라로 기억하고 있을 때 한국의 아름다움을, 한국의 화려한 색과 의상을 그들에게 선보인 것이지요. 이러한 선각자적인 혜안과 앞서가는 마인드, 50년 성상을 한결같이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용기와 의지와 노력을 후세에서는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이러한 앞서가는 도전정신을 가진 후손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앙드레 김’ 그 분의 삶의 족적을 한 번 짚어보고자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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