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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 800km 산티아고 순례길(11)
편견이 주는 무례함... “어찌 청명한 날, 유쾌한 날만 있을까!”
기사입력: 2021/06/24 [10:46]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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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여성신문 정은주 객원기자] 아침에 눈을 뜨니 샤워를 하고 나온 외국 청년이 가슴에 털이 난 상체를 드러내고, 바지는 입었다고는 하지만 팬티가 위로 삐죽 나올 정도로 헐렁하게 내려 입고 온 데를 다니고 있었다. 산티아고에서 마주하는 문화적 충격에 크게 놀랐지만 내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쉽게 넘겨야만 했다. 

 

  또, 간밤에는 베드 버그에 물려 몇 번이나 잠을 깼는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얼굴에다 팔다리에다 여기저기 울퉁불퉁 부어올라있었다. 발에 물집이 잡히고 발톱이 빠지거나 베드 버그에 물리는 것은 산티아고 순례 길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는 걸 알고부터는 제일 먼저 약부터 뿌려 두고 잤는데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러나 결국 나도 베드 버그에 당하고 말았다.

 

  광주에서 온 ‘앤’은 어젯밤에 춥다고 하더니 아침이 되자 오한이 나고 아파서 하루 쉬겠다고 했다. 내 오른쪽 무릎이 아플 때 선뜻 항생제를 먹어보라고 주었던 앤이 아프다니 더 마음이 쓰였다. 알베르게에서 하루 이상을 묵을 수 없다고 들었기에 동행도 안 되고 혼자 남기고 가기도 난감했다.

 

  하루 차이로 뒤에 걸어오고 있는 다른 한국인들에게 아픈 앤의 상황을 알려주고 돌봐줄 것을 부탁했다. 사정을 듣고는 오늘 앤이 있는 알베르게로 오겠다고 했다. 우선 앤에게 감기 몸살 약 이틀 분과 체력 회복제를 내어 주고, 아침을 먹을 수 있게 챙겨주고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오후쯤에 합류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무거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카미노 중에 다리를 절룩거리며 힘겹게 걷거나 길바닥에 주저앉아 쉬고 있는 순례자들을 종종 보게 된다. 걱정이 되어 도움이 필요한지 물어보면 대부분 괜찮다고 답한다. 나중에 또 만나게 되면 반갑다며 인사를 나누며 서로 격려할 때도 많지만, 무리하게 계속 걷다가 결국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어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갔다는 여행자도 있다고 한다. 안타까운 마음과 도움의 손길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 자신의 안전과 체력과 건강은 본인 몫일 수밖에 없다.

 

 

 

  얼마를 걷다가 맞은편에서 큰 개를 데리고 걸어오는 할아버지를 만났다. 비옷을 입고, 긴 막대기를 지팡이 삼아 짚고는 등에 배낭을 지고 있었다. 모두가 산티아고를 향해 걸어가는 터라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순례자가 있을 줄은 생각지 못했다. 프랑스어로 얘길 해서 자세히 알 순 없지만 그간의 힘든 과정을 설명하는 듯했다.

 

  언어가 다르면 간단한 소통은 되겠지만 자세한 사연이나 뜻까지는 전할 수 없으니 답답할 따름이다. 할아버지의 사연과 여정이 어땠는지 물을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서로가 입 가진 벙어리요 귀 가진 귀머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저 각자의 언어와 표정으로 인사를 나눈 후 다시 각자 걸어갈 길을 향하고 있었다.

 

  아침을 먹기 위해 도로 옆 카페에 들렀다. 그런데 카페 주인에게 음식을 주문을 하니 듣는 둥 마는 둥 하기에 못 들어서 그런 건가 의아했는데 자리에 앉은 뒤에도 포크와 나이프를 던지듯이 식탁에 내려놓는 게 아닌가! 그 뿐만 아니라 주문한 바게트를 접시도 아닌 식탁에다 툭 던지듯이 주고 가버렸다. 우리는 황당함에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간 산티아고의 친절함을 보아 온 우리로서는 식사하러 온 여행자에게 왜 이렇게까지 대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간혹 인종차별을 하는 곳이 있다고 하더니 그런 건가 싶어 인터넷을 찾아보니 앞서 이곳에 들른 다른 한국인들도 같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자신감 넘치는(?) 주인의 무례함이 모든 것이 편견 때문임을 알 수가 있었다. 억울함에 경찰이라도 부르고 싶었지만 정도가 지나치고 보니 오히려 그 사람이 딱하게 여겨졌다.

 

  카페 주인이 어떤 권리로 무시하는지 속을 다 알 길은 없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니 어쩌면 나도 누군가에게, 또는 어떤 대상에 대해 편견을 가진 것이 없을까 싶었다. 슬그머니 자성(自省)도 들고 보니 날 선 감정도 수그러들었다. 우리가 받은 부당한 대우는 카페 간판을 보며 한바탕 구시렁거리는 것으로 애써 마무리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한동안 걷다 보니 어제까지 괜찮던 오른쪽 무릎이 점점 아파지더니 절룩거리며 걸어야 했다. 걸음을 멈추고 테이핑을 더 단단히 했는데도 아픈 건 여전했다. 딸에게 엄마는 천천히 갈 테니 먼저 가라고 말은 했지만 엄마가 되어 딸의 짐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이를 악물고 걷고 또 걸었다.

 

  딸과 ‘한’을 비롯해 지나는 여행자들이 나를 향해 괜찮은지를 물어왔다. 나 역시 괜찮은 게 아니면서도 괜찮다고 답하고 있었다. 둔하면서도 긴장을 하고 걸어서인지 한 번은 몸의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도 했다. 철퍼덕 엎어지고 나니 창피함과 함께 무사히 도착할 수나 있을지 염려도 밀려왔지만 발목을 삐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어 그나마 다행이라 여겨졌다.

 

  어렵게 한 걸음씩 걷다 보니 오늘 묵을 작은 마을 빌람비스티아(Villambistia)에 도착했다. 가장 가까운 곳이 가장 좋은 알베르게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얼른 가서 쉬고 싶었다. 샤워를 끝내고 누워있자니 이탈리아에서 온 여행자가 와서 올바른 샤워 커튼 사용법을 일러주더니 샤워장 바닥에 물이 흥건하게 흘렀다며 닦으라고 했다. 그런 적이 없는데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가서 보니 우리 뒤에 씻은 ‘한’이 샤워 커튼을 밖으로 내놓은 채 씻었는지 바닥에 물이 흘러있었다. 

 

  우리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한은 이미 샤워 후에 외출하고 없는 상황인데다 그들의 눈에는 누가 그랬건 그저 한국인으로 비칠 것이니 말해 봐야 '누워서 침 뱉기'가 아닐까 싶어서 우리의 억울함은 눌렀다. 바닥을 닦고 나서 생각하니 어쩐지 불명예를 뒤집어쓴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기도 했다.

 

  몸과 마음이 조금 불편한 날이었다. 그러나 순례 길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도 모르게 마음을 다독이게 되고 공처럼 튀는 습관적인 반응도 조금은 숙고하게 되는 듯하다. 많은 날 중에 어찌 청명한 날, 유쾌한 날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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