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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로남불의 시대를 넘어서
기사입력: 2021/04/06 [10:31]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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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경우 본지 논설위원     ©UWNEWS

한국사회의 외형이나 교육수준에 비추어볼 때 늘 뒤처지고 이해 안 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우리 사회’라는 것이다. ‘내 편은 옳고 네 편은 틀렸다’는 ‘내로남불’! 믿음이 사라지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적대적 기형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특히 우파를 지지하는 시민과 좌파를 지지하는 시민들의 편 가르기는 자신의 옳고 그름을 자각하지도 못하는 분별의 상식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이 상태를 묘사하는 말이 ‘내로남불’이다.

 

영국의 싱크 탱크인 레가툼 연구소는 세계 167개국을 대상으로 2020년 번영 지수를 공개했다. 한국은 28번째 살기 좋은 나라로 나타났다. 그러나 최하위권도 있었다. 139위를 나타낸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 항목이다. 사회적 자본이란 공적·사적 관계 및 제도에 대한 신뢰와 참여 등을 수치화한 것인데, 우리 사회는 이 항목에서 낙제점을 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적 불신은 전 국민의 일반적인 정서인가? 그렇진 않다. 불신도는 젊을수록 높아졌다. 젊을수록 사회 정의가 낮다고 체감했고, 젊을수록 기존 세대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 것이다. 젊은 세대의 불신이 높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386세대는 한국사회의 낮은 ‘사회적 자본’ 현실에서 그 책임이 자유롭지 않다. 그들은 젊은 시절 혁명 전선에 뛰어들어 사회변혁에 앞장섰다. 시간이 지나 그들은 한국사회의 중추에 진입했다. 그러나 어떤 386그룹은 젊은 시절 익힌 조직과 공동체주의 문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자기 조직의 정당성만을 주장하는 조직 지향적 그룹이 되었다. 또 어떤 386그룹은 혁명의 풍모는 사라지고 현재의 기득권과 풍요로움을 누리는 개인주의적이고 시장 지향적 그룹으로 분열했다.

 

이들의 책임은 젊은 시절 그들이 획득한 변혁의 이미지를 가지고 사회 중심부로 진입했지만 이내 우리 사회의 기득세력으로 변모했다는 데 있다. 나아가 그 기득권을 지키고 보호하는데 젊은 시절 배우고 익힌 전술과 전략을 너무 잘 이용한다는 데 있다. 대법원장, 법무장관들 국회의원들은 사회 정의를 위해 시민들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최근 LH(한국토지 주택공사) 투기로 발가벗겨진 그들의 탐욕과 위선은 가히 무법 세상을 연상시킨다. 사회 정의는 고사하고 개인의 수치심조차도 사라진 듯한 낯 두꺼운 철면피 같은 그들의 행태에 한국사회의 사회적 자본은 다시 한번 곤두박질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일 년 예산은 558조 원이다. 그런데 넉 달 동안 98조 8000억을 나눠주는 엄청난 일을 보궐 선거를 앞두고 여야 양당 수뇌부가 결정했다. 비전과 명분이 없이, 없는 돈을 어떻게 해서든 만들어 내라고 기재부에 재원확보를 요구하며 강권적인 호통만 메아리쳤다. 코로나 사태로 한숨 소리 깊은 이 고통 속에서 800억 원이 넘는 비용을 보궐 선거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서울 시장, 부산시장 보궐 선거를 보라. 여·야 가릴 것 없다. 정책은 실종하고 서로 헐뜯기만 하는 창피한 선거운동으로 전락했다. 표가 아니라 정치불신과 혐오감만 확장하고 있을 뿐이다. 해야 하는 선거지만, 정책 없는 어이없는 선거판은 보고 있노라면, 단테의 신곡 지옥 편의 대사가 떠오른다. ⌜여기 들어오는 자여 모두 희망을 버려라⌟

 

지금의 시대를 4차 산업혁명 시대라 부른다. 인류의 관점에서 볼 때,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처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때에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면 나침반 없이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배처럼 방황하게 될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인공지능이 구별되는 그 경계지는 어디인가?

 

정체성이다. 정체성은 우리가 획득한 지식과 범주를 넘어선 영역이다. 인공지능이 외부에서 획득한 지식과 정보를 단순히 종합하고 범주화하는 존재라면, 인간은 그렇게 획득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자기, 성찰하고 사유함으로써 성장하고 성숙하는 자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 기능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와 분별의 기능이다. 이 기능은 인공지능이 대처할 수 없는 영역으로 인간만이 향유하는 고유한 능력이다.

 

 

자기를 성찰하고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은 수치와 부끄러움을 알게 만든다. 사람이 동물의 정체성을 가지면서도 개, 돼지와 구분되는 지점이 바로 수치와 부끄러움을 아는 바로 이 지점이다. 일탈된 행위가 남에게 특히 공동체에 노출될 때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느끼는 인간이 가진 아주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겠는가?

 

이런 점에서 내로남불은 우리들의 큰 숙제다. 객관성을 상실한 이 행태는 인간으로서 성찰과 사유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상실한 이 행태는 사람의 본연을 망각한 것이다. 자기 사람의 불법까지도 낭만으로 포장하는 이런 조직절대주의는 공감이나 소통을 기대할 수 없다. 그 결과 ‘사회적 자본’ 까지 침식시키는 것이 ‘내로남불’이다.  

 

열린 공감과 소통만이 행복하고 안정된 민주적 공동체를 유도한다. 우파 시민과 좌파 시민이란 감옥에 갇히지 말자.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혐오와 조롱을 거두며 상식의 회복을 도모하자. 내로남불의 비상식을 벗어던지자. 내 편과 네 편을 가르지 말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서로 불협화하고 반목하게 만들지 말자. 성찰과 사유에 기초한 분별의 상식이 회복되면, 대한민국의 내일에는 번영이 도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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