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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 800km 산티아고 순례길(7)
“길에서 만나는 다양한 표시들은 모두가 순례길을 응원하는 것처럼”
기사입력: 2021/03/26 [14:03]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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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정은주 객원기자] 로스 아르코스에서의 10월 13일 수요일. 낮에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어서 새벽에 출발하기로 했다. 헤드랜턴도 없는데 깜깜한 길을 나서도 될까 싶었지만 코스를 보니 출발해서 한동안 평지라서 괜찮을 것 같았다.

 

짐을 챙기는 사이에 언제 어디로 들어왔는지 고양이가 익숙한 듯 침대 머리맡을 차지하고 있었다. 잘 쉬다 간다며 인사를 건넸다. 수없이 바뀌는 여행자들을 보아왔을 고양이니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나 쿨하게 모른 척했다.

 

팜플로나 이후로 순례자들이 줄어든 것 같더니 오늘은 길 위가 한적할 정도였다. 왜 적어졌는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호젓함을 누릴 수 있으니 괜찮다. 어제까지 염증으로 아프던 엄지발가락도 항생제를 먹어서인지 좋아져서 발걸음은 한결 가뿐했다.

 

▲ 순례 길의 올리브나무 열매     ©UWNEWS

 

잠시 가파른 산이 있었지만 길은 대부분 순탄했다. 길가에는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가 이어졌다. 올리브는 피클이나 요리할 때 올리브오일로 썼는데 나무에 싱싱하게 달린 열매는 처음 보았다. 샌드위치나 카페에서 식사를 할 때면 절인 올리브는 빠지지 않고 나온다. 처음에는 손이 가지 않다가 몇 번 먹어보니 깔끔한 맛이 괜찮았다. 

 

 

종이에 소원을 적어 놓아둔 작은 돌탑 무더기를 지나기도 했다. 앞서 순례 길을 걸어간 여행자들이 무엇을 적었는지 모르지만 무언가 소망을 적을 때 마음만큼은 간절히, 정성을 담아 적었을 것이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간절한 모든 이들이 복을 받았으면 싶었다. 나는 글로 적지는 않았지만 감사함을 아는 사람이 되었으면 싶었다. 길가 나무에 국기를 달아두기도 했는데 우리의 태극기도 보여서 어찌나 반갑던지 힘내라며 응원하는 듯했다. 길에서 만나는 다양한 표시들은 모두가 순례 길을 응원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 비아나 가는 길의 미니마켓 자율판매대     © UWNEWS

 

 

길가에 미니마켓도 있었는데 좌판에는 바나나와 오렌지, 휴지 등 몇 가지를 내놓고 필요한 것을 사갈 수 있는 무인 자율판매대였다. 아무도 욕심내지 않았고 아무도 그저 가져가는 이도 없는 듯했다. 우리도 오렌지 하나를 사먹었다. 그 길에서 먹어서 그런지 역시 달고 맛있었다.

 

아스팔트길을 걸을 때는 흙길에 비해 발이 좀 피곤했지만 오늘은 12시가 채 되지 않아 비아나의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일기를 써서 사진과 함께 올리려니 계속 업로드 실패였다. 무선인터넷이 시원스레 되던 우리나라에서는 당연하게 여기던 것이었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있어 당연한 것은 무엇이고 마땅한 것은 무엇일까?

 

▲ 비아나의 산타 마리아 성당     © UWNEWS

 

알베르게 근처 산타 마리아성당은 13세기 교회로 로마 개선문에서 영감을 받은 르네상스식 건축물이라고 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외벽을 보니 성서의 이야기가 섬세하게 조각된 작품이었다. 하지만 성경을 모르고 순례 길을 걷자니 내용도 의미를 알 수 없어서 눈뜬장님이 따로 없었다.    

 

저녁 먹으러 나가다가 아침에 헤어졌던 한국인 일행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어 같이 갔다. 일행 중 한분은 토끼스튜를 시켰는데 맛있다며 추천했다. 나는 후식으로 라이스밀크를 주문했는데 말 그대로 우유에 밥을 말아놓은 것이었다. 아주 달달한 우유였는데 계피가루까지 뿌려서 나왔다. 고소한 맛을 기대해서 그런지 내 표정은 해괴한 맛을 느꼈을 때의 그것이었다.

 

엄청나게 매운 소스도 나왔는데 맛을 보니 입에서 핵폭탄이라도 터진 듯했다. 옆 식탁의 손님이 소스를 가져가도 되겠냐고 물어와서 우리 일행 중 한 분이 입에 손을 대며 놀란 제스처로 답했다. "oh! dangerous (오! 위험해요)" 두 테이블에서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웃음이 외국어가 아니라 만국공통어라 참 다행이다. 웃음을 공유하지 못한다면 세상이 너무 푸석푸석하지 않을까.

 

 

밤이 되어 막내와 페이스 톡으로 통화를 했다. 첫날부터 엄마가 귀국하는 날을 꼽으며 매일 화이트보드에 써 놓았다고 하면서도 아이는 괜찮다고 했다. 여행가서 집을 걱정하고 마음 쓰면 완전한 행복을 느낄 수 없지 않느냐며 여행을 즐기라고 했다. 막내가 애써 엄마를 향해 응원하고 있었다.

 

내일도 비 예보는 있지만 날씨야 내 능력 밖의 일이니 더 염려해서 무엇 하겠는가? 산티아고에서의 오늘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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