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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울산탐방 - 두동면 2
기사입력: 2006/09/06 [18:18]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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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성 주필.시인

박제상의 부인이 치술령에서 동해를 바라보며 지아비를 그리며 통곡하다 바위로 변했다는 전설은 지아비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박제상의 우국충정에 감동된 사람들이 그들을 후세에 기리기 위해 그런 전설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 당시 치술령에서 두 딸과 함께 망부석이 된 박제상의 부인 김씨를 이곳 사람들은 치술령의 치술신모(神母)가 되었다고 믿고 이곳에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제를 올렸음을 상기하면 그 당시 부인 김씨에 관한 이곳 사람들의 극진한 애정을 느낄 수가 있다.

 나라에서도 박제상의 충절과 부인 김씨의 정절을 높이 치하하여 박제상의 딸을 미사흔의 부인으로 삼고 박제상에게 대아찬으로 관직을 높여주고, 김씨 부인은 국대부인에 추봉하였다.

 이들에 관한 전설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 척과리 산 152번지에 위치한 은월암 과도 연결된다..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1호인 이곳 은월암은 새(乙)가 숨은(隱) 바위(岩)라는 뜻이다. 박제상의 부인이 치술령에서 몸이 돌로 변해 망부석(望夫石)이 될 때 영혼은 새가되어 날아 이 바위에 깃들었다고 한다.
 
이 새가 날아오른 자리를 비조라 하여 이곳 두동면 만화리에는 비조라는 이름의 마을이 생겼고  또 새가 바위틈에 숨었다 하여 이 바위를 은월암이라 했는데 여기에 지은 암자를 은월암이라고 불렀다. 
 
이곳 은월암과 망부석은 서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 위치에 자리하고 있는데 해마다 이곳에는 박제상의 안타까운 전설을 찾아오는 많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코스가 되어 있다.

 이곳 치술령에는 박제상의 전설과 함께 또 다른 하나의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제19대 눌지왕이 어느 날 잠자리에 들 무렵에 갑자기 대왕의 귓전에 요란스러운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기괴하게 생각한 눌지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문무백관을 불러 이 아기울음의 진원지를 찾으라는 명을 내렸다.

 한밤중에 궁성이 발칵 뒤집혀서  아기의 울음소리를 찾았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 후에도 아기의 울음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들려왔다. 이 기괴한 소문은 이내 나라에 퍼졌고 민심은 흉흉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기 울음소리의 정체를 밝히지는 못했고 용하다는 점술가를 동원해 봤지만 그 아기울음의 진원지는 오리무중이었다.

 급기야 눌지왕은 아기 울음소리를 직접 찾아보기로 결심하고 어느 날 밤 몸을 청결히 하고 제천선신께 제를 드린 후 아기울음 소리의 방향을 따라 길을 떠났다.

 왕이 직접 울음소리를 쫒아 길을 나서자 신기하게도 아기울음소리는 한결 부드럽게 들렸다.  눌지왕이 울음소리와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떼면 그 아기울음소리는 이상하게도 곡소리가 되어 시끄럽게 들렸고 울음소리와 같은 방향이면 다시 아기울음소리는 온화한 울음소리로 변하곤 하는 이상한 징조를 보이곤 했다.

 이렇게 하여 치술령의 중간쯤에 이르자 그곳에서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뚝 그쳤다. 왕은 말에서 내려 주위를 살펴보니 금방 만든 것 같은  작은 무덤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눌지왕이  그 무덤을 보는 순간 방금 그쳤던 울음소리가 더욱 애절하고 구슬프게 들려왔다.  눌지왕은 신하들에게 그 울음소리가 나는 무덤을 팔 것을 지시하여 그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무덤을 얼마 파지 않아  솜으로 된 아기 포대기가 나오고 그 속에는 금불상이 하나 나왔다. 금불상은 흡사 살아 숨 쉬는 아기처럼 보였다. 눌지왕은 그 금불상을 받아들고 금불상을 가슴에 안으니 울음을 뚝 그치는 것이 아닌가? 왕은 이 금불상이 흡사 아기와 같은 생각이 들어서 금불상을 어르며 "그래그래 내가 너의 한을 풀어주마"고  했더니 불상은 구슬 같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왕의 일행은 그 포대기에 불상을 감싸 안고 마을로 내려와 포대기 임자를 수소문하여 찾아보니 그 포대기의 임자는 금슬 좋기로 소문난 가난한 젊은 부부였다. 왕이 이 포대기가 무덤에 묻힌 사유를 추궁하자 젊은 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사연을 털어 놓았다.

 이 부부는 눈과 귀가 먼 어머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이 부부 사이에는 웅이란 아들이 태어났다. 웅이는 아무 탈 없이 무럭무럭 자라줘서 이들 부부는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부부가 일터에 나가면 웅이는 할머니와 늘 함께 지냈다.

 이들 부부는 가난하지만 온 정성을 다해 극진히 노모를 모시고 살았다. 그런데 문제는 눈이 어두워 보이지는 못하시는 어머님이 이들 부부가 정성을 다해서 만든 음식을 자신은 잡수실 생각은 않고 손을 더듬어 손주의 입을 찾아  음식을 먹이시곤 하시어 부부는 민망스러워 어머님이 잡수실 것을 권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이런 세월이 반복되자 어느 날 부부는  우리는 아직 젊으니 자식은 또 낳으면 되지만 어머님은 한 번 잃으면 다시는 못 보시게 되니 우리가 저 아이를 없애야 만이 어머님이 제대로 진지를 드실 수가 있겠다며 자식인 웅이를 버리자고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잠든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캄캄한 밤에 산에 가서 땅을 파고 묻었다고 실토하며 흐느껴 울었다.

 눌지왕은 이 갸륵하고 눈물겨운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도 효심이 지극한 착한 백성이 있다는데 큰 감명을 받고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런 중에 귀가 들리지 않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이 젊은 부부의 어머님이 부부의 우는 소리를 들었는지 방문을 열고 "우리 웅이 깼느냐"하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님의 목소리를 들은 이 젊은 부부는 대답을 못하고 마냥 땅을 치고 통곡만 할 뿐이었다.

 이때 눌지왕은 젊은 부부 대신 “예” 하고 대답 하고는 금불상이 된 웅이를 늙으신 어머님 의 무릎에 안겨 주었다. 웅이를 받아 안은 어머님은 포대기에 싸인 금불상을 이리 둥글 저리 둥글 어르며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어머님은 웅이가 없어지는 날부터 밥상을 받아 놓으시고는 매번 웅이를 찾으시며 잠을 잔다고 거짓으로 말씀드린 말을 믿고 “웅이가 깨면 함께 먹으마” 라고 하시며 밥상을 물리셨던 분이니 얼마나 반가워했겠는가.  어머니는 한참을 금불상을 어르다가 "자 우리 밥 먹자" 하고 밥상을 찾는 순간 웅이를 안고 앞으로 쓰러지고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눌지왕은 너무나 착하고 순박한 이들 부부의 애환을 직접 접하고는 아기 웅이가 묻힌 이 치술산을 벼슬을 준다는 뜻인  령(嶺)자를 쓰서 치술령이라 이름 지었는데 그 이름이 지금까지 불리어 지고 있다고 한다.

 그때 눌지왕이 말을 매었던 자리를 말 등이라 전해오고 있고 웅이가 묻혔던 자리에 웅치사란 절을 지어 오랫동안 웅이의 넋을 위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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