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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울산탐방 - 두동면
박제상의 전설이 있는 치술령
기사입력: 2006/08/21 [17:41]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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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일성 주필/시인

담백한 맛을 자랑하는 봉계 한우(韓牛)불고기
 
울주군 두동면은 울산광역시 울주군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63.41k㎡이고2004년 9월 30일 집계로 1천840세대수에 인구는 3천821명이고 법정리로는 만화리, 구미리, 월평리, 삼정리, 이전리, 봉계리, 천전리, 은편리 이렇게 8개리로 두동면이 구성되어 있다. 

이곳은 태백산맥이 종주하고 있는 곳이라서 동쪽으로는 치술령을 넘으면 경주시 외동읍이 나오고, 남쪽으로는 허고개를 지나 범서읍이, 서쪽으로는 경부 고속도로를 경계로 하여 두서면, 그리고 북쪽으로는 경주시 내남면과 인접하고 있다. 이곳에 위치한 산들은 그리 높지 않으나 기복이 심한 것이 특징이다.

두동면은 타 지역에 비해 비교적 교통이 불편하고 사람들의 왕래가 많지 않았던 탓에 선조들의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고 옛 모습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 많다.

특히 유적지는 보존상태가 좋아 천전리 각석 등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이곳은 천전리 각석 외에도 박제상의 유적지인 치산서원이 있고 역시 박제상과 관련된 치술령의 망부석과 은평리와 만화리의 지석묘 군이 있으며 천전리에는 공룡발자국이 있어 이러한 유적지를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봉계리의 한우(韓牛)고기는 그 육질이 뛰어나서 미식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곳은 해 마다 한우 불고기 축제가 열려 많은 울산시민들이 이곳을 찾아 한우 불고기와 함께 잡다한 문화행사를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 불고기는 생고기를 그대로 참숯불에 얹어 왕소금을 뿌려서 먹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먹는 불고기를 봉계식 불고기라 부르는데 이런 봉계식 불고기 맛이 좋은 이유는 첫째로 냉장육이 아닌 생고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맛과 영양이 뛰어나고 둘째는 참숯불의 열기가 고기를 골고루 익혀주기 때문에 고기가 부드럽고 참숯 특유의 향까지 베어 고기 맛이 뛰어나다고 한다.

그리고 인공조미료가 첨가된 양념 대신 오직 왕소금만으로 간을 맞추기 때문에 그 맛이 거의 자연에 가깝다고 하는데 진짜 봉계 전통한우불고기의 맛이 좋은 이유는 형산강 상류에 위치한 물 맑고 공기 좋은 봉계의 자연 속에서 볏짚과 잡초를 먹고 자란 무공해 한우이기 때문이라고 이곳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실제로 이곳 두동면과 두서면에는 백여 개의 목장에서 주민들이 직접 질 좋은 한우를 사육하고 있으며 도축과 가공 소비 등의 전 과정이 일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봉계한우는 믿을 수 있는 진짜 전통 한우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 두동면 만화리 산 30-2번지에 자리한 치산서원은 신라 충신 박제상과 그의 부인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박제상(朴堤上)은 (삼국유사에는 김제상(金堤上)이라고 기록되어있음)  시조 혁거세의 후손으로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의 5대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할아버지는 아도갈문왕(阿道葛文王)이며, 아버지는 파진찬(波珍飡) 물품(勿品)이다.

당시에 신라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402년에 왜에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412년에는 고구려에 미사흔의 형 복호(卜好)를 볼모로 보냈다.

내물왕의 큰아들인 눌지왕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볼모로 잡혀 있는 동생들을 데려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협상에 능한 마땅한 인재를 찾던 중에 당시에 삽량주간(?良州干)으로 명망이 높던 박제상을 신하들이 천거하게 된다.
 
왕은 신하들이 천거한 박제상을 고구려에 보냈는데 박제상은 고구려왕을 회유해 무사히 복호(卜好)를 구출해 돌아온다.

오랫동안 고구려의 볼모로 있던 동생 복호(卜好)를 만난 눌지왕은 매우 기뻐하면서도 일본에 있는 동생 미사흔(未斯欣)을 생각하며 눈물짓곤 했다.
 
이러한 눌지왕을 본 박제상은 일본으로 건너가서 미사흔(未斯欣)을 구해오기로 결심하고 곧장 배를 타고 일본으로 향한다.

왜에 도착한 박제상은 자신은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 온 사람이라고 왜왕을 속이고 일본에 살면서 물고기와 새를 잡아다 왜왕에게 바쳐 신임을 얻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안개가 짙게 낀 틈을 타서 박제상은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해  고국으로 보내는데 성공하였으나 자신은 일본을 탈출하지 못하고 잡히고 만다.

이후 왜왕은 박제상을 회유하기 위하여 왜국의 높은 벼슬을 주겠노라고 외유하였지만 박제상은 일본 왕의 설득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계림(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될 수 없으며 계림에서 벌을 받을지라도 왜국의 벼슬이나 녹 따위는 먹지 않겠다”며 왜의 회유를 완강하게 물리친다.

그러자 일본왕은 박제상을 더 이상 설득할 수 없음을 알고 박제상의 발바닥을 벗겨 갈대와 뜨거운 철판 위를 걷게 하는 등의 고문을 하다가, 마침내 박제상을 불에 태워 죽이고 만다.

이러한 박제상에 관한 이야기는  구전설화에서는 박제상의 충성심보다는 그 부인이나 딸의 인간적인 괴로움에 관심을 두고 다루고 있다.

박제상이 미사흔(未斯欣)을 구출하러 떠난다는 이야기를 들은 부인이 박제상의 뒤를 쫓아가다가 만나지 못하자 망덕사(望德寺)의 남쪽 모래 위에 누워 부르짖었다는 곳의 모래를 '사람들은 장사'(長沙)라고 했으며, 식솔들이 집으로 데려가려 하자 부인이 다리를 뻗고 앉아 일어나지 않았다는 땅은 '벌지지'(伐知旨)라 했다고 전해 온다.

그 뒤 부인은 세 딸과 함께 치술령(述嶺)에 올라가 일본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망부석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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