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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를 따라 탐방하는 울산의 명승, 유적지 25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 (2)
기사입력: 2023/02/16 [16:57]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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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송화 울산문화관광해설사     ©UWNEWS

* 서생포왜성의 규모

성곽의 전체 면적이 해자를 포함하여 46,000평이다. 평면상의 직선거리는 동서 약 870m, 남북 약 370m에 달해 동남해안 각지에 세운 왜성 가운데 규모가 가장 웅장하고 옛 모습이 잘 남아 있다고 한다. 

 

현재 산정에는 전투지휘소 역할을 하는 천수각 터가 남아 있으며, 본성 맨 서쪽에는 장군수라는 우물터가 있고, 왜성 남쪽에는 병사들의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터가 확인된다. 성벽은 외성(外城)의 경우 바깥쪽에만 돌로 쌓는 내탁식(內托式)으로 하고 내성(內城)은 안과 밖 모두를 돌로 쌓는 협축식(夾築式)으로 축조하였다. 

 

기울기는 지면에서 60~70도로 경사지게 하여 성벽의 위세를 보여주고 있다. 

 

왜성이 위치한 곳을 보면 왜군과의 수송 연락관계를 고려하여 선박출입이 편리한 장소에 주변의 강이나 바다 근처, 사방을 내려다볼 수 있는 독립된 구릉에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그곳은 뛰어난 전망대라고 볼 수 있다.

 

왜성의 특징을 살펴보면 마을 중심부를 하나의 성곽으로만 둘러싼 조선의 읍성과는 그 형태가 판이하다. 

 

조선의 읍성은 성문이 한 군데라도 뚫리면 쏟아져 들어오는 적군을 막는데 심각한 문제가 생기지만 왜성을 점령하려면 겹겹이 둘러싸인 성곽을 바깥에서부터 출입구를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뚫어야 한다. 그러므로 왜성은 방어하기에 아주 좋은 구조라고 한다. 

 

 

 

* 임진왜란이 끝나고

1598년 8월 마침내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1598년 (선조 31년) 당시 정유재란에 참전한 명나라 마귀(麻貴)장군이 승전을 기념하는 축하연을 열기 위한 장소로 창표당(倉表堂)을 지었으며, 아울러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의병들을 배향하기 위한 창표사도 지었다. 두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소실되었다가  2016년 울주군에서 창표사를 중건하였으며, 이 제당에서 매년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으로 명나라는 엄청난 군비를 소모함으로써 국력이 약화되어 마침내 청나라가 들어섰다. 일본역시 극도의 국력소비로 민생이 도탄에 빠졌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막부시대가 시작되었다. 

 

조선은 두 번에 걸쳐 일어난 왜란의 최대 피해자로 국토의 초토화는 물론 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고, 각종 국보급 문화재가 소실되었다. 전쟁 후 서생포왜성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1895년까지 약 300년 동안 조선수군의 동첨절제사영(水軍同僉節制使營)으로 사용되었다. 

 

‘울산서생지도’에는 동헌과 객사, 관청건물과 시장, 민가 등이 그려져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참고하면 서생포왜성은 16세기 말 일본인들의 성곽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또한 일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1938년 사적 54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지금은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생포왜성의 몇 가지 큰 역할은 1594년(선조27년)부터 사명대사와 가토 기요마사 사이에 강화회담을 한 곳이며, 임진왜란 초기에는 작전본부의 역할을 하였고, 왜군이 철군할 때는 최후의 거점 역할을 했던 곳이다. 서생포왜성이 지닌 역사적 의미에서 살펴보면 우리 선조들이 외침을 당하여  이를 목숨 걸고 지켜내려 했던 국난극복의 현장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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