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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 800km 산티아고 순례길(30)
“피할 수 없는 미션처럼” 딸과 따로 걸어 사리아(Sarria)까지
기사입력: 2022/06/10 [15:55]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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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은주 객원기자    ©UWNEWS

  오늘은 11월 5일 토요일, 프랑스 생장 피드 포르에서 10월 6일에 출발하여 피레네산맥을 넘으면서 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이제 일주일도 채 남겨두지 않았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걷지 않으면 어색할 듯하다. 

 

  어제 딸과 말다툼 이후 아침을 먹으면서도 서로 말이 없었고 ‘한’은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애를 썼다. 짐을 다 싸고 출발할 즈음에 딸에게 ‘지금부터라도 자유롭게 따로 걷는 게 낫겠다’며 결정에 가까운 제안을 했다. 

 

  딸도 같은 심정이었는지 군더더기 없이 동의하였고 한은 펄쩍 뛰며 말렸다. 딸과 한에게 그동안 나의 느린 속도에 발맞춰주느라 힘들게 해서 미안하고 고마웠다며 무미건조한 인사를 했다. 이제부터라도 각자 페이스를 존중하고 여정을 담담히 마무리하자며 먼저 알베르게를 나왔다. 

 

  이곳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처음 만나는 이들과 가까워지기도 하지만 평소 가깝게 지내는 이들이 함께 왔다가 사이가 멀어지는 일도 많다고 했다. 장거리 도보에 자신의 체력을 감당하느라 피로감이 누적되면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니 조그만 일에도 서로 민감해지기 십상이다.

 

  오늘 어디까지 걸을지, 어떤 알베르게로 갈지 아무것도 정하지 않고 출발했다. 길을 알려주는 친절한 앱이 있지만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다. 마을마다 이정표가 있어서 눈만 똑바로 뜨면 내가 어디를 거쳐서 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디서 머물든 자유롭게 하려고 배낭도 지고 왔다.

 

  출발할 때부터 비가 왔는데 햇볕과 비가 술래잡기라도 하는 듯 오락가락했다. 갈리시아 지방이 산악지대라 특히 겨울에는 눈보라로 인해 고생한다는데 지금은 가을이어서 그나마 걷기에 순탄한 계절이다. 

 

  어제처럼 산길과 숲길이 이어졌는데 비가 오니 역시나 쉴 만한 곳도 없었고 길에서 만난 여행자도 없이 혼자 걸었다. 많은 사람과 어울리고 자연스럽게 관계를 맺는 것이 숙제처럼 다가올 때가 많았는데 오늘은 애쓰지 않아도 되니 내 안의 에너지 소모가 줄어든 듯했다. 

 

  숲에서 나는 소리, 냄새, 습도, 그리고 햇볕에 따라 변하는 온도와 바람결의 움직임을 느끼면서 걸으니 이제야 비로소 오롯이 나의 길을 걷는 듯하여 평온하였고 나로 인해 다른 이가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다는 자의식에서도 풀려난 듯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산길이 오전에 끝나고 몇 개의 마을을 지나 점심 무렵에 사리아(Sarria)에 도착했다. 중세 때부터 순례의 중심도시로 남아 있는 곳인데 며칠 동안 소박한 산골 마을만 지나친 것에 비하면 큰 도시였다. 산티아고를 향하는 여러 루트가 있는데 이곳에서 합류하기에 여행자들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100km 이상만 걸으면 순례자 증서를 발급해 주는데 일주일 이내로 시간을 내어온 여행자들은 산티아고까지 117km 정도 남은 이곳을 출발지로 해서 걷는다. 물론 증서를 받기 위해 걷는 것은 아니겠지만 생장에서부터 걸어온 사람들과 새로이 합류한 사람들이 섞여 활기를 띠는 곳이다. 

 

  마을 초입에 들어서니 멀찍이 보이는 어느 카페 앞에 딸과 한의 배낭과 스틱이 보였다. 순간 반갑기도 했지만 멈추지 않고 그냥 지나쳐서 가기로 했다. 나 자신의 초라함과 더 마주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닐까. 오늘은 10km 정도만 걷고 이곳에서 쉬기로 했다.

 

  중심가에 가기 전에 깨끗해 보이는 알베르게가 보여 들어서니 내가 오늘 첫 손님이라고 했다. 헤드 랜턴과 휴지를 선물로 주었다. 조금 있으니 남녀 한 쌍이 들어왔는데 이내 밖으로 나갔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나를 위해 배려한 것처럼 내가 잠들 때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알베르게에서 스파게티와 주스로 저녁을 먹고 일찌감치 자리에 누웠다. 그동안 누가 하라는 것도 아니건만 카카오스토리에 매일 그날의 풍경을 글로 써서 올렸는데 오늘을 끝으로 공개는 하지 않고 나를 위한 일기만 쓰기로 했다. 

 

  남은 시간이라도 외부로 분산됐던 시선과 마음을 정리하고 침잠하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하루 동안의 사실과 생각의 흔적들을 쏟아낸 일기라지만 불편한 기억의 조각은 은근슬쩍 뭉개기도 하니 솔직하기도 쉽지 않다.  

 

  언젠가 큰딸이 ‘엄마는 무인도에 가서도 잘 살 것 같다’고 하더니 한 달간 어찌 견뎠나 싶을 정도로 홀가분함이 들자 한편으로는 딸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혼자 하루를 보내고 나니 ‘내가 이런 사람이었던가’하고 내 안의 대수롭지 않게 지나온 면과 마주하는 듯했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산티아고 노인은 84일간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허탕을 치면서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나갔다. 3일간의 사투 끝에 청새치를 낚았지만 상어에게 다 뜯기고 결국 뼈만 싣고 돌아온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다’라는 말이 힘이 될 때도 있지만 너무 높은 지표처럼 다가올 때도 있는데 지금이 그렇다. 나약함과 매일 마주하면서도 마치 피할 수 없는 미션을 받은 사람처럼 속수무책 그저 걷고 또 걷는 나를 본다.

 

  어쩌다 내가 당연한 듯이 이 순례길을 걷고 있는지 여전히 모르겠고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는 확실하다.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산티아고를 향해 걸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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