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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울산시문화관광해설사’를 따라 탐방하는 울산의 명승, 유적지
보성학교 전시관 (울산시 동구 방어동)
기사입력: 2021/11/24 [10:43]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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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지지 않는 보성의 불꽃, 항일독립운동의 터전이 되다” 

고종황제가 최초로 사립전문학교에 내린 교명...보성학교

 

 

 

▲ 장분자 울산문화관광해설사     ©UWNEWS

보성(普成) ; 널리 열어 사람다움을 이루다. 

  보성은 대한제국 고종황제가 최초 사립전문학교에 내린 이름이다. 민족 사립 보성학교는 1909년과 그리고 1920년 두 차례 설립했다. 1차 1909년에는 일산리(현 일산동)에 세웠지만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규제를 받아 폐교 되었다. 2차 1920년에는 3.1운동으로 독립운동이 고조되고 민족교육 열기가 확산 되었던 시점에서 성세빈 선생의 제안으로 재설립하게 된다. 

 

  1920년 어선의 동력화, 일제강점기 식민지에서 생존전략 모색, 1923년 간토대지진 이후 울산 출신의 일본 유학생들이 귀국하여 해외에서의 활동 경험과 사회주의 사상을 고취시킴도 보성학교의 설립배경이다. 동면 방어진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집단 이주해 어업기지가 형성되어 항일의지가 컸던 시점이다. 특히 방어진은 임겸조(하야시카네구미)의 어업근거지로서 마치 자신의 직할 소도시처럼 만들었다. 그 당시 일본인이 울산보다 동면에 5배나 더 거주했다.

 

  사립학교 인가 나기 전 지역선각자들의 기부를 받아 야학부터 운영, 1922년에 정식개교 되었으며 초대교장인 성세빈을 비롯해 박학규, 성세륭, 김천해, 서진문, 이효정, 천호문, 장기준, 장병준 등 독립운동가들이 교사로 함께했고, 학생들 역시 배움을 통해 항일의식을 높혔다. 졸업생은 21회에 499명 배출했다.  

 

  그리고 재학생은 소년회에 가입해 소년운동을 통해 성장했다. 졸업생과 학교 교사들은 청년단체에 가입해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교장 성세빈을 비롯해 연장자들은 신간회 울산지회 결성을 이끌었고, 동면지역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사회운동을 지도했다. 

 

  보성학교 학생들이 펼쳤던 소년운동은 회원들의 학습에 그치지 않았다. 적호소년회는 동면지역을 순회하며 강연회를 개최하고, 아동극을 통해 주민들에게 일제강점기 사회문제를 쉽게 전달하는 계몽운동이 되었다. 

 

  그리고 청년들은 청년회 기본활동 외에도 동면의 어민과 노동자들을 묶어내는 사회단체 활동으로 이어졌다. 성세빈, 박학규 등 연장자들은 울산에서 사회주의, 민족주의 계열로 나누어졌던 독립운동단체를 총망라한 신간회 울산지회 준비와 창립에 적극 결합했다. 울산지역 최대 독립단체가 만들어질 때 중심을 잡는 버팀목이 된 것이다. 

 

 

  보성학교와 동면지역 항일운동이 성장하자, 일본 제국주의 당국은 눈엣가시처럼 느꼈다. 보성학교 교사였던 서진문은 일본으로 가 재일조선노동총동맹에서 활동하던 중 1928년 10월 일왕 히로히토의 즉위식을 앞두고 진행된 대규모 검속 때 체포된다. 그 후 혹독한 고문을 견디며 단식으로 항거하다 사망(11월17일), 하루 전에 석방된다. 

 

  1929년 1월11일, 서진문의 유해가 고향으로 돌아오자, 보성학교 졸업생과 재학생 그리고 동면주민들이 장례를 치루고 화정동에 묘소를 만들었다.(현 화정공원,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 이 장례식이 발단이 되어 1929년 2월18일 일본 당국은 보성학교가 불온하다며 학교폐쇄 명령를 내렸다. 학교 교사들의 사상이 불순하다는 이유였다. 

 

  주민들이 학교 폐교의 부당성을 탄원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교장 성세빈을 비롯해 교사들이 동반 퇴진하는 조건으로 페쇄 명령을 거둘 수 있었다. 학교는 유지했지만 상처가 컸고, 항일의식은 더 높아져 갔다. 

 

  1934년 4월30일 전 세계노동절(MAY DAY)을 앞두고 “무산자는 힘을 합해야 한다”는 수업을 했다는 이유로, 교사 장기준, 천순도가 체포 연행된다. 1935년 5월1일에 최도준, 김두생, 정진도 등, 5명의 보성학교 학생이 방어진 일대에 ‘제국주의 타도! 무산자 단결!!’ 문구를 적은 벽보를 붙여 체포됐다. 

 

  일본 경찰은 방어진 벽보사건과 연결해 박학규, 이동계, 이미동, 등 울산지역 독립운동가를 줄줄이 묶어 체포했다. 이른바 ‘울산적색비사사건’ 또는 ‘울산독서회’ 사건이다. 

 

“울산교육 독립운동가 100년의 빛” ‘성세빈’은 1929년 4월21일, 신간회 울산지회 1주년 기념식때 울산군내 ‘민간교육 공로자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1938년 6월25일 46세의 일기로 서거(분사)하였다. 장례식 사진에 “창립주의 고별식 고성세빈과 보성학원”이라고 쓰여있다.

 

  

<주민들이 한마음으로 세운 송덕비>

“바람불고 비오는 날도 이십여 년의 세월 학교를 지켜오셨네 

잠시도 앉아 쉬지 않으셨고 갯벌을 고르고 닦은 뜻, 변치 앉음도

본래 하늘의 뜻이라 여겼음이지 그 덕행을 잊지않고 천만년을 이어가리라”

 

 

  이곳 일산동에는 자기 전 재산을 바쳐 학교를 설립한 이종산 묘와 아름다운 전설이 있는 낙화암(예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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