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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양성평등주간 기획특집 - 여성사 이야기(3)
‘몸’으로 풀어보는 여성사 이야기
기사입력: 2019/07/14 [16:04]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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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WNEWS

 

매년 7월 1일부터 7일까지는 양성평등주간이다. <양성평등주간>은 남성과 여성의 조화로운 발전을 위하여 규정한 기념 주간으로 1996년부터 시행된 <여성주간>이 2015년 양성평등기본법으로 개정 되면서 <양성평등주간>으로 개칭되어 시행되어지고 있다. 본 지는 2019 양성평등주간을 맞아 <가족제도와 가족문화 변천사>와 <몸으로 풀어본 여성사 이야기>를 2회에 걸쳐 게재한다. 

 

 

3. 통제받는 몸

 

 

▲ 매산리 사신총, 묘주인과 처첩의 초상     © UWNEWS


사회의 분화와 함께 점차 남성을 중심으로 한 가부장 질서가 확립되면서 여성의 몸은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 통제되기 시작했다.

 

부여에서는 간음하거나 부인이 투기하면 살인한 자와 마찬가지로 중죄로 취급하였다. 투기의 경우는 사형에 처할 뿐 아니라 매장을 허락하지 않는 중형을 내렸다. 투기죄가 가혹한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부여와 고구려에서 남성들이 여러 명의 처나 첩을 두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에서 다처제의 모습은 고분벽화에서도 확인된다.

 

이와 같이 다처제가 행해질 경우 가부장을 중심으로 한 가족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처들 사이의 투기를 억제하기 위해 부여에서와 같이 여성의 몸에 가혹한 통제를 가했던 것이다. 여성의 몸이 가부장적 가족질서 속에 종속되어졌음을 보여준다.

 

 

 

● 강요되는 몸

 

고대사회에서는 혼전이나 재가에 대한 금기가 없이 남녀가 자유롭게 교제했다. 여성은 혼인에 있어서 결정권이 없었고 가부장의 의사에 따라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혼인에 있어서 가부장의 뜻을 거스를 경우는 그에 따른 응징이 가해지기도 했다.

 

 

고구려 시조인 주몽의 어머니 유화는 아버지인 하백 몰래 해모수와 야합했다하여 쫓겨났다.

평강왕은 딸의 부왕이 정해준 고씨와의 혼사를 거부했다하여 궁에서 쫓겨났다.(삼국사기)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면 여성에게 삼종지도(三從之道)와 부덕(婦德)을 강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여자가 따라야 할 대상인 삼종은 아버지, 남편, 아들이었다. 이는 여성의 개인적인 주체로 보기보다는 태어나서는 아버지, 결혼 후에는 남편,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에 종속된 존재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   발해 문왕의 딸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묘비(左) 정효공주의 묘(右, 중국 지린성)                                ©UWNEWS

 

 

발해 3대 문왕의 둘째딸 정혜공주의 무덤에서 묘지가 새겨진 비석과 그의 동생인 정효공주의 묘비가 발견되었다. 두 묘비는 생애에 대한 서술만 다를 뿐 묘비에는 부덕과 어머니로서의 모습이 강조되고 있다. 정효공주의 부덕으로 칭송되었던 것은 혼인 후 한 집안으로서 지조를 지키고 삼종을 지켰다는 점이다.

 

 

고대사회에서  여성은 신적존재로 숭배되기도 했으며, 신을 대리하는 사제이기도 했다. 불교가 유입된 이후에는 관음의 현신으로 여겨졌을 뿐만 아니라 가계의 시조로 숭앙 받은 여성도 있었다. 때로는 가계 혈통을 계승할 수 있는 몸이기도 했다.

 

 

 

 

 

4. 지배되는 몸

 

처가살이를 하고 외손자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우리의 오랜 풍속이었다.

조선은 고려와 다르게 중국의 성리학을 받아들여 나라의 기본 정신으로 삼는다.

성리학의 발달은 결혼제도나 양반집의 생김새, 생활방식까지 곳곳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 신사임당의 친정살이와 ‘친영제’

 

 

▲ 신사임당 초상화(좌), 사임당이 그린 포도(우)     © UWNEWS

 

시·글씨·그림에 능하였던 조선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여류 예술가. 본관은 평산(平山). 호는 사임당으로 1504년 10월 29일 강릉 북평촌(오죽헌) 외가댁에서 신명화공의 둘째 딸로 태어나 외조부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예술가인 동시에 높은 덕과 인격을 쌓은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의 모범상이 되었다.

 

신사임당은 19세에 이원수와 결혼한 뒤에 거의 20년 동안 강릉에 있는 친정에서 살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결혼풍습인 처가살이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신사임당 어머니 이씨부인과 외조모의 경우도 친정살이를 했다. 신사임당도 결혼 뒤 곧바로 시댁으로 가지 않고 친정에서 살면서 자식을 낳고 기르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살았다.

 

조선 초기 성리학자는 정도전은 ‘처가살이’ 때문에 여성들이 교만하다고 하면서 송나라 결혼제도인 ‘친영제’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친영제’는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데려와 신랑 집에서 결혼식하고 사는 것을 말한다.

 

조선 4대 왕인 세종은 왕실에서 모범을 보이고자 숙순 옹주를 친영제에 따라 결혼시켰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결혼풍습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 후 명종 때에 ‘처가살이’풍습과 ‘친영제’를 섞은 새로운 결혼풍습을 선보이게 되는데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결혼식을 치르고 며칠 신부 집에 머물렀다가 신부와 함께 신랑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지금 우리의 전통 결혼과 같은 모습이다.

 

 

 

● 여성은 재혼할 수 없다?

 

 

 

 

고려 시대부터 동성동본끼리 결혼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 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조선시대에 와서 ‘동성동본 금혼제’가 법으로 정해지고 양반들을 중심으로 널리 퍼졌다.

 

또 조선시대 남성들은 처첩을 둘 수 있었고 재혼도 할 수 있었지만 중혼(겹치기 결혼)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아내가 있는데 또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경우가 있었다.

 

성리학이 널리 퍼지면서 조선 사회는 ‘부계 직계 가족제도’로 바뀐다. 그 제도를 튼튼하게 하는 또 다른 제도가 ‘재가녀 금고법’이다. 

 

재가녀 금고법은 ‘재가한 여성의 자식은 과거 시험을 볼 수 없게 하는 법’이다. 고려 시대에 여성의 재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재혼했다고 욕하거나 손가락질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여성이 재혼하는 것을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고 인간의 도리를 저버리는 것이라고해 법을 통해 여성의 재혼을 죄악시 하게된다.

성종 8년(1477년)에 관리들 사이에서 여성의 재혼 금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져 관리 46명중 42명이 재혼을 찬성하고 4명만 반대했지만 이 후 성종 16년에 ‘재가녀 금지법’이 시행되었다. 처음에는 주로 양반 여성들의 재혼을 금지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평민 여성들도 재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여성들은 하시 마시오!

조선 시대 초기에는 옛 풍습을 바꾸기 위해 새로운 제도를 많이 만들었다. 그중에는 여성들에게 “이런 일은 하지 마시어.”하는 금지 조항이 많았다. 모든 여성이 지켜야 했지만 특히 유교의 가르침을 중요하게 여기는 양반 가문에서 여성들에게 강요했다.

 

● 거리에 나가 행사를 구경하면 안 돼!

 

고려시대 여성들은 나라에서 여는 불교 행사나 큰 잔치를 마음대로 구경했다. 조선이 세워진 뒤에도 얼마 동안은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여성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성리학자들은 거리에 나온 여성들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여성들이 거리에 모이고 난간에 기대어 거리낌 없이 구경하니 부끄럽습니다. 이는 여성이 해야 할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이제부터 여성들이 구경하는 것을 금지해야 합니다.”

 

 

● 꽃놀이도 안 돼!

 

▲  경국대전                                       ©UWNEWS

고려시대 여성들은 금강산이나 집 가까운 산에 가서 제사를 지내곤 했다. 그러자 성리학자들은 “부인들이 바깥에서 꽃놀이를 하면 안된다.”고 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조선시대의 법전『경국대전』에는 “양반집 여성으로 산이나 물가에서 놀이나 잔치를 하고, 산천에 직접 제사를 지낸 자는 장 1백대를 맞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 절에 가면 안 돼!

 

여성들이 자유롭게 절에 가는 일도 금지했다. 그래도 여성들은 절에 가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 얼굴을 드러내고 다니면 안 돼!

 

▲  처네쓴 여인(1805), 신윤복(1758~?) 소매가 달리지 않은 간단한 가리개 옷을  처내라고 한다.   ©UWNEWS

 

조선시대 양반 여성들은 외출할 때 다른 사람이 맨 얼굴을 보지 못하게 하려고 쓰개치마나 장옷을 걸쳤다.

 

남편이나 자식이 아닌 남성과는 말을 하거나 손이 닿아도 안 되고 쳐다봐도 안 됐다.

 

 

 

남녀칠세부동석과 남녀유별

 

▲ 추사 김정희선생의 사랑채(좌)와 안채(우), 남자의 공간인 사랑채가 생기는 등 남녀유별의 이념이 16세기 후반 양반의 가옥 구조에 반영되었다.     ©UWNEWS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世不同席)’ 일곱 살이 되면 남녀가 함께 앉지 않는다는 이 말을 요즘은 우스개 소리로 하지만, 조선 여성의 몸을 지배하던 대표적인 유교 관념이다.

 

<예기(禮記)> 내칙(內則)편에 실린 이 말은 원래 ‘일곱 살이 되면 남녀가 자리를 함께 하지 않으며, 함께 먹지 않는다.(七年 男女七世不同席 不共食)’는 문장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남녀의 분리는 남녀의 일상을 지배하였다.

 

유교는 남녀의 결합을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보았다. 남녀의 결합으로 부부가 탄생하고, 부부의 결합으로 인간의 사회질서가 형성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예는 남녀를 구별하는 데서 시작한다고 보았다.

 

 

조선 사회에서 여성의 몸

 

조선 사회는 여성의 몸을 어떻게 인식하였을까? 『여계』첫 장에서는 여성이 마땅히 행할 도리로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옛날에는 여아가 태어난 지 삼일이 되면 침상 아래 눕히고, 기와와 벽돌을 가지고 놀게 하며, 깨끗이 씻겨서 조상의 사당에 알린다. 

 

여아를 침상 아래 눕히는 까닭은 여자는 낮고 약한 존재로서 다른 사람의 아래에 처해야 함을 밝히려는 것이다.

 

기와와 벽돌을 가지고 놀게 하는 것은 수고로움을 익혀 부지런히 일하는 것에 힘써야 함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아이를 깨끗이 씻겨 조상의 사당에 보고하는 것은 제사를 이어받는 일을 주로함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이 세 가지는 여자가 해야 할 마땅한 도리(女人之常道)이며 예법의 확고한 가르침이다.(『女誡』「卑弱」)

 

 

노동과 제사는 유교 가부장제 사회를 현실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생산적인 활동으로서, 여성을 노동하는 존재, 제사 받드는 존재로 규정한 것은 유교사회가 여성의 생산능력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노동과 제사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낮고 약한 존재(卑弱)’라는 여성 자신의 존재론적 인식이 필수적이었다.

 

▲ 소혜왕후(인수대비) 경릉. 성종의 어머니로 부녀자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해「내훈」을 지어 남존여비 사상을 형성시키는데 영향을 끼쳤다.     © UW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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