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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근
서재정리
기사입력: 2019/05/10 [12:00]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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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석근 前 울산시인협회장/수필가     ©UWNEWS

학창시절부터 좋은 서재 하나 갖기를 꿈꾸었다. 그 꿈은 여간해 이뤄지기가 어려웠다. 1960년대 중반부터 생존을 위해 건설현장을 떠돌며 한가하게 책을 펴들고 앉아있을 여유도 시간도 없었다. 일생의 꿈으로 생각하고 20대 후반에 조금 모아놓은 시집, 소설류는 5년의 해외생활을 하고 돌아오니 동생들이 한권 두권 나들이 때마다 들고나가 모두 없어졌다.

 

늘 마음속에 책을 모으겠다는 일념은 사라지지 않았고 1980년대 초부터 해외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오면서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차츰 책이 많아지면서 이사할 때는 골칫거리였다. 가족의 핀잔도 있었지만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며 모은 것이 수천 권에 이른다.

 

중국고사에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란 말이 있듯 그동안 많은 책을 읽었다. 그 가운데 문학에 관한 책이 가장 많았고, 다음이 향토사 자료들이었다. 아마 추산해 보면 2천여 권은 읽은 것 같고 지금 서재에 쌓인 책들이 수천 권은 될 성싶다. 하지만 이까짓 수량이나 책 류는 여느 사람도 쉽게 가질 수 있는 종류이고 수량이다.

 

올해 졸수가 가까이 되면서 왠지 책걱정이 부쩍 심해진다. 하기야 옛 어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성 싶고 오히려 남에게 내어놓기가 부끄러운 일이기도 하다. 소장본 가운데는 한 때 인기가 높고 고가로 구입했던 원서 브리테니카는 30여 년 전 40만원을 줬으니 만만찮은 금액이다. 영어 실력이 얕아서 단 한권도 보지 못하고 10여년 뒤 한글판을 구입해 보았다. 동아백과, 민족백과, 한국시조백과, 남북한 한글백과(북한발간) 등 많은 백과사전이 서가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만한 책들은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만한 책들이어서 들어내기가 민망스럽다.

 

지난 시절 일제강점기에 책을 많이 가졌던 집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만권당(萬卷堂) 이라 불렀다. 나라가 망하자 뜻있는 부잣집에서 인재를 양성을 하려고 책방을 열었다. 당시로선 파격적 재산의 사회 환원이기도 했다. 악랄한 일제는 한민족의 역사와 전통의 맥을 말살시키려고 그동안 전해오던 고서적 20만권을 강제 수거해 불태웠고 우리의 고조선 사를 왜곡 시켰다. 이에 뜻있는 사람들이 집에다 만권의 장서를 구비해 놓고 전국의 초학자들을 오게 했다. "우리 집에서 보고 싶은 책을 마음껏 보면서 몇 달이라도 좋으니 숙식비는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인재 양성을 위한 자구책이었다. 이 집안이 대구 화원의 남평문씨가 세운 인수문고였다. 또한 경주에는 경주 이 씨 집안의 우현서루가 있었다. 현재도 인수문고는 후손인 문태갑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에 내려와 문고를 관리하고 있으니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86세의 노익장을 과시하며 책을 보러오는 방문객에게 커피를 대접한다니 박수를 받을만한 일이다.

 

만권당이 경상도에만 있었던 게 아니고 전라도 고창읍 주곡리에도 만권루가 있었다. 현곡 유영선(1893~1961)이 1922년에 세운 현곡정사에 있었다. 

 

현곡은 간재 전우(1841~1922)의 뛰어난 제자 5명 중 하나였고, 6천석을 거두는 부자였다. 그런데 자비로운 것은 현곡정사가 자리한 터가 거미(蛛) 명당이었는데 책이 진열된 만권루는 거미의 몸통 자리에 해당 되었다. 현곡정사의 수용 인원은 60명 정도였고 이들 모두 빈 몸으로 찾아와서 몇 달씩 머물며 책을 읽었다고 했다. 현곡의 아버지 유기춘(1860~1930)은 부자이면서 덕을 베푸는 사람이었다. 그는 환갑잔치를 하지 않고 그 비용으로 고을의 배고픈 사람 3~400명에게 양식을 나누어 준 인심 후한 사람이었다. 흉년이 들었을 때는 곳간을 열어 쌀을 퍼가도록 배려를 했다. 훗날 그가 죽자 고을 사람들이 자진해서 그 고마움을 잊지않으려고 송덕비를 세웠다는 아름다운 미담이 전해온다.

 

특히 고창은 동학혁명의 발산지이며, 6.25를 거치면서도 혁명기와 전쟁 통에도 이 집안사람들은 다친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 없으니 덕인의 베푼 미덕 때문이 아닌가 싶다. "거미는 똥구멍에서 줄을 뽑는데, 덕과 베풂의 거미줄로 주변을 다 연결해 놓으면 어떤 풍파도 그 덕의 거미줄을 뚫고 들어올 수 없다"고 조용헌은 '만권당' 에서 언급하고 있다.

 

세상에는 지식보다 더 귀중한 것이 인심이다. 아무리 만권당 우현서루를 열었어도 가난한 시절 배고픔을 달래주는 덕을 베풀지 않았다면 단명할 수도있었으려만 그의 인덕이 가슴을 찌른다.

 

국운이 쇄하여 인재를 키우기 위한 선조들의 만권당 책방운영은 감명이 깊게 전해온다. 하찮은 책 수천 권을 어떻게 처분할지를 걱정하는 내 처지가 되려 부끄럽기도 하다. 그러나 책을 아끼는 사람이나, 귀하게 보존할 기관이 있으면 흔쾌히 기증이라도 해야겠다.

 

가족들에게는 이 책들을 갈무리 하거나 물려줄 처지가 못 되니 애석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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