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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운동의 모태 언양 작괘천 변‘인내천’바위
‘人乃天(인내천)’바위 명각 100주년에 즈음, ‘울산독립공원’ 추진운동 활발
기사입력: 2015/08/27 [18:34]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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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WNEWS

언양 작괘천 변 봉화산 기슭 큰 바위에 ‘人乃天’이라 크게 명각되어 있다.

인내천 바위는 천도교라는 한 종단의 종교적 교의를 전하기 위한 새김이 아니라, 민족의 수난기인 일제강점기에 민족독립을 염원하던 울산 언양인들이 당시 부당한 일제의 침탈과 무단정치를 벗어나 민족자결주의의 민족자주독립의 의지를 담아 약속하였던 새김이다.

▲   김종환  21세기의병대 총사령   © UWNEWS
이규정 ‘울산독립공원’ 추진위원장(11대,15대 국회의원)의 말씀을 옮겨보면, “인내천 바위는 울산 독립운동사의 요람이요, 성지이다.

정확히 100년 전 이 땅 울산의 애국지사들이 망국의 길을 걷고 있던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고 구국의 결의를 다지던 곳이다. 바위의 인내천이란- 사람이 곧 한울이란 성인의 가르침을 명각했다.”고 전한다.

보국안민 척양척외의 기치를 내걸었던 동학 혁명의 좌절을 통분해하며 “1915년 민족정신의 결의를 다지며 바위에 새겼으며, 4년 후에 일어날 3.1독립만세 운동을 준비하던 성지이다”고 사자후를 토한다.
 
3.1독립만세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가 연합하는 거족적인 민족운동!
 
당시 민족운동을 주도적으로 준비하던 천도교 측에서 거국적 운동을 위하여 기독교 측과의 연대를 구하여 기독교계의 지도자 이승훈과 신민회 활동가 언론인 이종일의 합류, 보성학교 교장 최린의 중재로 불교계 만해 한용운 참여로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가 연합하는 거족적인 민족운동이 시작되었다.

세계의 어느 나라를 두고 보아도 종교가 한 목적으로 연합을 하는 경우는 잘 없다.

종교란 자신의 교리가 최고이며 절대 진리라는 믿음으로 존립의 의의를 가지기에 다른 종교에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원천적 아집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다른 종교 간의 화합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미3.1독립만세운동에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가 서로 힘과 뜻을 모아 일으킨 역사는 우리 민족이 종파를 뛰어넘어 민족의 자주독립을 얼마나 염원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례는 인류역사상 초유의 일이 아닐 수 없다.
 
人乃天(인내천) 바위의 큰 글씨는 민족자주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울산언양인들의 지고한 바램의 새김
 
그 연장선상에서 언양 작괘천(酌掛川) 변 봉화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바위에 명각되어 있는 人乃天(인내천) 바위의 큰 글씨는 종교의 교의를 넘어 존중과 배려를 통해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인내천 정신으로 민족자주독립을 이루고자는 울산언양인들의 지고한 바램이 새겨진 곳이다.
 
기미독립만세운동은 천도교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되자 천도교인들은 대대적인 민족저항운동을 준비한다. 손병희 3대교주의 유지를 받아 천도교 중앙학교 송진우 교장과 현상윤 선생님 그리고 보성학교 최린 교장이 거사를 준비한다.

당시 일제의 무단통치는 테라우치 총독에 이어 육군대장 출신의 하세가와 총독이 부임하여 식민정치를 강화하였다.

1919년 1월 말 손병희는 “고국민대회(告國民大會)”란 포고문으로 명성황후의 시해와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음을 미국을 비롯한 열강과 12개국에 알렸다.

2월 8일 동경유학생 백관수, 최팔용, 이광수 등의 2.8독립선언이 자극제가 되어 고종임금의 인산일인 3월 3일을 즈음하여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모일 것을 감안하여 3월 1일 정오를 거사일로 정한다.

민족대표 33인(천도교15명, 기독교 16명, 불교 2명)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인사동 태화관에서 낭송하고 일경에 의에 체포되자, 민중들은 파고다 공원에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언양의 독립만세운동은
 
고종황제의 인산(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하여 상경한, 천도교 울산교구장 김교경이 서울 파고다공원의 3.1만세운동을 직접 지켜보고, 울산교구의 천도교인들에게 독립신문과 국민회보의 기사를 편지와 함께 보내면서, 울산언양의 독립만세운동 준비를 당부한다.

고종황제의 독살에 대한 글을 보고 울산교구의 천도교인들은 심한 충격을 받아, 즉시 교인들을 소집하여 의논하여, 휘문의숙 출신 이규장을 서울에 보내어 김교경 교구장의 지시를 받아오게 하였다.

최해규, 곽해진, 이규천, 유철순, 이무종, 이규로, 이규장 등 7인은 비밀회의를 개최하고 거사를 준비한다. 유림에서는 이무종 외에 이규인 등이 가세했다.

휘문의숙 동문인 이규장, 이무종 두 사람이 총참획을 맡아 조직과 연락 선언문 등사와 태극기 제작을 담당하였고, 휘문의숙 동문이 황선윤을 불러 동참하게 하였다.

3월 29일, 언양 장날인 4월 2일을 거사일로 잡고 길천리 이무종의 사랑방을 본부로 하였다.

이무종은 상남면 면사무소에 밤중에 잠입하여 등사기를 훔쳐와 황선운과 등사하고 새벽에 다시 면사무소에 갖다 놓는 대범함을 보였다.

이무종에 사랑방에 모인 이규인, 이성영, 강경찬, 최해선, 이규경 등은 이규인의 빈집에서 밤을 새워가며 태극기를 만들었다.

4월 2일 언양 장날은 상쾌한 봄바람이 불고 청명한 날씨였다.

이른 아침 거사의 주동인물 이무종, 이규인, 이성영, 강경찬, 최해선, 이규경, 이종능 등 7명은 장터로 향했다. 김만출이 청년들에게 이규인, 이성영, 강경찬 등이 태극기를 비밀리에 나누어 주었다.

정병한이 체포되어 주재소로 연행되어 가자 김성진노인의 대한독립만세를 기점으로장판은 군중들의 태극기와 만세소리가 물결쳤다. 일경의 발포로 17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나 대한독립만세소리는 해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산 좋고 물 맑은 간월산 동편 아래 작괘천이 역사를 머금고 도도히 흐른다.

일제강점기인 1915년 유월 중순 초여름 작괘천의 수려한 풍광이 내려다보이는 봉화산 기슭의 바위에 4년 후 기미년 언양독립만세운동의 저력이 되는 인내천이 명각되었다.

인내천 바위의 글은 시인이요 명필이었던 춘사 김영걸님이 쓰고 각자는 함석헌님이 하였다.

인내천 바위의 명각은 당시 천도교 초대교구장 최해규 선생과 2대 교구장 김교경이다.

이들은 기미년의 언양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훗날 언양의 거리마을에 양정학원을 설립하였다.
 
종교의 교의를 뛰어넘어, 울산에서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만세운동 이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기약한 인내천 바위의 명각은우리 고장의 자랑이요. 자긍심이다.
 
인내천 바위 명각 100주년을 맞이하여 인내천 바위를 잘 보존하고 그 정신을 더욱 고양하기 위하여 인내천 바위 일원을 ‘울산독립공원’으로 성역화하기 위한 시민들의 뜻이 한데 모여 추진위가 만들어지고 그 정신이 확산되어 울산에도 전국에서 세번째로 독립공원이 설립되기를 기원한다. /21세기의병대 총사령 김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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