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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길의예절산책)
자제(子弟)는 남의 아들이다
기사입력: 2014/08/28 [12:56]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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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옥길 예학자     ©UWNEWS
상대를 대접할 때 쓰는 말들이 금세(今世) 와서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자제(子弟)’라는 말이다. ‘자제’라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한 아이들이 있다고 하니 세대 간 언어 단절의 심각성을 여기서도 엿볼 수 있다. ‘자제’라는 말을 모르니 ‘자식’이니 ‘아들이’이니, ‘딸’과 같은 말을 되나가나 쓰고 있다. 대학물을 먹은 사람도 “선생님 아들이 벌써 아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나요?”, “선생님 막내아들이 몇 살이죠?”, “선생님 딸하고 우리 딸이 유치원 동기래요”와 같은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해댄다. 제자가 선생과 맞먹는 꼴이다.

“들어가나요?” “몇 살이죠?” “동기래요” 을 “들어갑니까?” “몇 살입니까?” “동기입니다.”로 말을 할 줄 모르고 있다. “습니다.” 말이 없어지고 있다. 말이 천박 하여 지고 있는 말 이다. 요즈음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라고 말해야 될 것을 “그래요” 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래”라는 말은 공경 말이 아니고 낮춤말이다. 그 어미(語尾)에 “요”를 갔다 붙인 것이다. <요>라는 말은 공경 말이긴 하지만 모르는(소원한) 사이에 쓰는 접미사이다.

“들어가나요?” “그래요”등은 비속어 인데 학자들도 비속어로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학자들의 수준이 의심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 하지면 어학자들이 시대에 편승하여 하향평준화 됐다는 말이다.

 배운 사람이라면 상대를 고려하여 그 상대의 아들과 딸 또한 높여 불러야 한다. “아드님” “따님”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자간, 부녀간 부모와 자식이 함께한 자리에서 그렇게 부르게 됨은 자식을 부모 앞에 <어른>을 만들어 놓으면 부모가 설자리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변명은 상대를 높이는 것이지 그 아들과 딸을 높이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 된다.

<아들>을 쓸 자리에는 “자제(子弟)”라는 한자어(뜻 말)를 쓸 수 있다. ‘자제’는 ‘남을 높여 그의 아들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하여 “교수님, 벌써 자제가 중학교에 들어가 가십니까?” 와 같이 쓸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분>을 넣어 ‘자제분’이라 표현할 수도 있다. ‘자제’는 남을 높여 그의 아들을 이르는 말이다. 그리하여 “선생님, 벌써 자제가 중학교에 들어갑니까?” 와 같이 쓸 수 있다. <들어가나요?>라는 말은 천격이다. 대학 교수라는 작자가 <들어가나요?>하는 것을 보았다. 경우에 따라서 <분>을  넣어 <자제분>이라 표현할 수도 있다. 자제가 학덕이 높을 경우 이다. 아무리 학덕과 연세가 높다 하더라도 그의 부모와 함께 한 자리에서는 <님 과  분>은 쓸 수 없다. 전자에 말한 바와 같이 자녀를 어른으로 만들어 놓으면 부모가 설자리가 없어진다. 는 것을 유념해야 된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자제’는 남의 아들에게만 쓴다는 것이다. 남의 딸에 대해서 쓴다든지, 아니면 남의 아들딸에 대해서 쓴다든지 하면 안 된다. 상대가 아들과 딸을 두고 있는 줄 알면서도 “자제분을 모두 유학에 보내셨다면서요?”와 같이 쓰면 남의 딸을 아들로 만들어놓은 꼴이 된다.

남의 아들과 딸은 묶어서 말을 할 때는 ‘자녀(子女)’라고 한다. “자녀를 몇이나 두었습니까?” “그는 슬하에 세 자녀를 두고 있다.” 등과 같이 쓸 수 있다. ‘자녀’에도 ‘자제’와 같이 높임의 자질이 있어 격이 높다. 물론 ‘분’을 덧붙여 ‘자녀분’이라 표현할 수도 있다.

 ‘자녀’와 같이 ‘아들딸’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한자어에‘자식(子息)’이 있다. 자기의 아들딸에게 쓸 수 있는 것이 ‘자녀’와 다른 점이다. “늦게 본 자식하나 있는데 말썽만 피우고 있습니다.” 와 같이 쓸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놈’을 붙여 ‘자식’이라 표현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자식’이라는 말을 남의 아들딸에게 쓰면 곤란하다. “당신 자식 교육이나 잘 시켜”에서 보듯 남에 대한 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쁜 자식”에서 보듯  ‘자식’은 ‘남자’에 대한 <욕>으로 쓰인다. 실제로의 본뜻은 아들과 딸을 의미한다.

‘자제’나 ‘자녀’와 같은 말을 잃어가는 시대는 삭막한 시대이다.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인간다운 마음이 시들해지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제자가 스승까지 함부로 보고 아무렇게나 말하고 있으니 통탄하다 못해 부끄러운 일이다.

초등학교 자모회에서 만난 여 제자가 선생 아내를 보고 ‘사모님’이라 부르지 않은 다는 말을 듣고 쾌심해서 분을 이기지 못했다. 그 사람 국어 교수도 <사모님>이란 말이 어폐가 있는 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원래 <師母> <師父>는 일본 말이다. 우리말에 사부 사모란 말이 없다. <사모>는 일본말 스승의 아내이나, 스승의 어머니란 뜻이다. <사부>는  아버지 같은 스승을 말하나, 스승의 아버지 이다.
 
일본 사람들이 한자로 말을 잘 만드나 우리만 못하다. 중국말 틀로 된 배달말 <사부(師傅)>는 스승을 말한다. 또한 조선 시대 세자시강원의 으뜸벼슬인 사(師)와 부(傅: 스승 부)이다. 師는 영의정이 겸하였고, 傅는 좌우 정승 한 사람이 겸하였다. <사모님>이라 불러주지 않아서 분해 할 것 없다. <선생님 댁>이라 해야 좋은 말이 된다. 상대를 높이면 자기도 덩달아 올라가는 법이다. 이런 것을 학교에서 가르치지 못하고, 가르쳐도 효과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다시 말을 하지만 <師母 師父>란 말은 조선시대에서는 없었던 말이다. 왜인들이 만들어 낸 말을 우리는 즐겨 쓰고 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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