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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여행기)
장건, 현장법사 보다 훨씬 앞서 서역여행
실크로드 통해 중국의 비단, 칠기, 약재 전해져
기사입력: 2009/02/13 [19:09]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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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편집이사
▲   양관은 옥류관과 함께 중국에서 서역으로 나가는 관문역할을 했다.
서역 여행과 관련 장건은 자주 현장법사와 비교된다. 시기적으로 보면 장건이 100여명의 부하와 함께 월지국을 향해 떠났던 때가 기원전 139년이 되어 현장법사에 비해 760여년이나 앞선다. 현장법사가 서역여행을 시작한 것은 당나라 시대인 628년이다.

660년 출생인 현장법사는 13세에 승적을 딴 고승이었다. 이후 불교를 연구하고 수행과 정진을 계속했던 그가 황제의 명을 거역하고 서역여행에 오른 것은 28세 때다. 당시만 해도 서역 여행은 어려움이 많아 태종은 현장법사가 서역여행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황제의 권유를 뿌리치고 황제 몰래 구도의 길에 올랐다.

그는 이후 18년 동안 110여 개 국을 순례했다. 그는 서역에서 돌아 올 때 불상 9기와 불교관련 서적을 많이 가져왔는데 불전만 옮기는데도 22필의 말이 필요했다고 한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아 단신으로 여행하는 것도 어려운 시대에 그가 서역 여행을 하면서 이렇게 많은 불경과 서적을 가져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고 이를 통해 고대 및 중세초의 서남아시아 역사와 불교문화가 중국에 많이 소개 되었다.

특히 현장법사는 5천축 80개국 중 75개국을 순방하면서 사실적인 기록을 남겨  당시 많은 나라로 나누어져 있었던 인도 역사를 통일적으로 파악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했다.
그는 귀국 후 지은사에 머물면서 서역에서 가져온 서적을 연구하면서 대안탑을 건립하는 등 서역을 중국에 알리기 위해 힘쓰다가 664년 입적했다.        
이에 비하면  장건이 월지국 여행을 할 때는 서역이 전혀 알려지지 않아 그가 찾아가는 월지국이 어디에 있는지 또 그가 여행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일을 당할지를 알 수 없었다.

그가 한 무제의 명으로 월지국으로 간 것은 시도 때도 없이 침입하는 흉노족을 월지국과 협력해 무찌르기 위해서다. 그러나 장건 일행이 월지를 향해 서역의 길에 올랐을 때 그를 기다리는 것은 흉노족의 포로생활이었다.
월지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흉노의 땅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는 중국을 빠져 나오는 순간 바로 흉노족에 잡히는 몸이 되었다. 이후 그는 10여 년간 흉노족의 포로로 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부인을 두고 자식까지 얻었지만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흉노족의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탈출에 성공, 마침내 대원국을 거쳐 월지국에 도달했다.

월지국은 자신이 당초 생각했던 것 보다는 먼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월지국이 흉노족과 싸울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월지국 역시 옛날에는 흉노족의 침입을 자주 받아 흉노족을 무찌를 생각을 했지만 장건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비옥한 지대에 안주하고 있어 더 이상 흉노족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교섭에 실패했던 그는 타림분지 남쪽, 즉 천상남로를 거쳐 귀국하게 되는데 귀국 하는 도중 다시 흉노족에  붙잡혀 억류생활을 했다.

그가 흉노족을 탈출해 중국으로 온 것은 기원전 126년으로 중국을 떠난 지 13년만이었다. 그가 중국으로 올 때는 흉노 부인과 부하 감보가 동행했다. 장건이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체격이 건장해 어떤 고통도 참아 낼 수 있었고 또 성격이 관대하고 신의를 지켜 흉노족으로부터 호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월지국과 동맹에는 실패했지만 그의 서역 견문은 한의 무제를 비롯한 당시 중국인들에게 놀라움과 충격을 주었다. 이때부터 월지국은 물론이고 대원, 오손, 강거 등 중앙아시아 각국의 사정과 문물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인도의 존재가 중국에 알려지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장건의 여행과 관련 황제 무제가 가장 관심을 두었던 것은 서역에서 생산되는 명마였다. 장건은 돌아 온 후 대원국은 천마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에서 키우는 천리마는 피땀을 흘리면서 하루에 천리를 달려 갈수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무제는 천리마를 얻기 위해 대원국에 군대를 보내기도 했다.

 요즘도 우루무치 박물관에 가면 이곳에서 옛날에 길렀던 천리마의 모습을 전시 해 놓고 있어 관광객들이 실물은 아니지만 옛 명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설명문에는 ‘천리마는 피땀을 흘리면서 하루에 천리를 뛰었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장건의 서역 여행은 서역의 문화를 중국에만 알린 것이 아니고 한나라의 위력을 서역에  알리는 계기도 되었다. 그리고 중국과 중앙아시아 각국이 서로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중국의 문물이 서아시아는 물론이고 심지어 로마까지 전파되었다.
이때부터 교역로가 비단길로 불리어지게 되는데 그것은 중국에서 이 길을 통해 전해진 대표적인 물산이 비단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교역 물품을 보면 포도와 석류, 호도, 낙타, 사자, 공작, 향로, 상아, 산호, 유리가 서역에서 중국으로 들어왔고 반대로 중국의 비단, 칠기, 약재가 서역에 전해지게 되었다.
물론 당시 교역품을 보면 교역품이 대중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고 주로 귀족들의 사치 생활을 위한 물품이었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로마의 귀족들은 당시 중국에서 수입되는 비단을 아주 좋아해 비단을 구하기 위해 어떤 값진 물건도 파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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