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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여행기)
양관, 옥문관과 함께 실크로드 관문 역할
기사입력: 2009/02/07 [10:28]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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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여성신문

 
양관은 옥문관과 함께 실크로드의 중요한 관문 역할을 했다. 돈황은 인도와 이란으로 통하는 중국 고대 통로였는데 그 통로의 열쇠 같은 역할을 양관과 옥문관이 한 것이다.
지형적으로 보면 옥문관이 실크로드 북로상의 중요한 기점이었다면 양관은 남로상의 기점 역할을 했다.


양관은 돈황에서 남쪽으로 70km 지점에 있다. 버스로 한 시간 정도 거리다. 돈황 시내를 벗어나면 사막이 나타나고 양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사막 길을 한참 달려야 한다.
 돈황을 벗어나 사막 길에 들어서 한참을 달리다 보면 모래위에 세워진 옛 성을 볼 수 있다. 사막에 무슨 성이 있나 하고 들어가 보니 영화세트장이었다. 이 세트장은  1987년 중일 합작으로 소설 ‘돈황’을 제작할 때 지은 건축물이다. 송대의 돈황 성곽과 거리를 재현해 놓은 건축물은 요즘도 돈황과 관련된 영상물을 찍을 때면 단골로 등장한다.

입구에는 ‘돈황고성’이라는 팻말이 있는데 건축한지 20여년이 지났지만 전혀 훼손되지 않았다. 당초 일본은 영화 촬영 후 이 건축물을 없애버리려고 했는데 중국에서 남겨 두기를 원해 그대로 버려 놓고 갔다고 한다.

양관은 이곳에서도 사막 길을 한참 달려야 도착 할 수 있다. 세트장에서 양관까지는 모래벌판으로 이어지는데 그 중앙에 아스팔트를 깔아 놓았다. 신기한 것은 사막에 나타나는 신기루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사막 저 멀리 흡사 물이 출렁이는 저수지처럼 보이는 지역이 있는데 차가 가까이 가면 사라지곤 했다. 

 양관에 가까워지니 이곳 특유의 오아시스 경관이 보인다. 사막위에 푸른 나무들이 자라는 마을이 있고 마을의 수로에는 물이 넘쳐흐르고  양떼들이 이 물을 마시고 있다.
양관에서 옛 관문의 흔적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모래 바람이 새기 때문에 건축물이 견디어 낼 수가 없다. 대신 이곳에도 흡사 돈황 고성의 세트장처럼 옛 성이 복원되어 있다. 이 성은  2002년에 복원되었다. 규모로 보면 대단히 큰 건물이다.

성으로 들어서니 전시관이 있다. 전시물은 대부분 성 주위에 흩어져 있던 것을 수집한 것이다.  이곳은 풍사가 심하다. 실제로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풍사로 모래 속에 묻혔던 귀중한 유물들을 찾아내어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전시관에서는 병기와 도기 그리고 옛날 화폐 등을 볼 수 있다. 전시관에서 나와 성으로 들어서면 옛날 중국 복장을 한 사람들이 앉아 이 성을 빠져 나가는 관광객들에게 도장을 찍어주고 있다. 이것은 옛날 사람들이 양관을 나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관의 도장을 받아야 했는데 오늘날 이것을 재현하는 것이다. 대신 이들은 관광객들이 주는 팁을 받는다.   
   
전시관 뒤편 언덕에는 봉화대가 있다. 거리상 전시관에서 멀어 접근이 쉽지 않다.  이 봉화대는 한나라 시대 세워진 것이다. 당시 중국은 서안에서 이곳까지 30km 거리마다 봉화대를 세웠다고 하니 봉화대의 숫자가 얼마나 많았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돈황에서 양관으로 가다 보면 이런 형태의 봉화대가 사막위에 세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봉화대는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봉화대의 높이는 4.7m, 밑 부분의 폭은 7.5~8m, 탑 부분은 8m이다.   
전시관 앞에는 말을 탄 큰 동상이 있다. 동상의 인물은 중국인으로 서역 탐험을 가장 먼저 했던 장건이다. 장건이 서역 탐험에 나섰던 것은 기원전 139년이다. 그는 이후 13년 동안 서역을 떠돌면서 고생을 하다가 중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장건은 서역으로 갈 때는 천상북로의 길을 택했고 돌아올 때는 남로를 통해 들어왔다. 그러니 그는 돌아올 때 이곳 양관으로 온 것이 된다.

시기적으로 보면 현장법사 보다 700~800년 앞서 서역 탐험을 한 것이 된다.  
이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진 것은 그가 돈황에 머문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그는 돈황을 거쳐 대월족으로 가게 되었는데 지금의 우루무치에서 흉노족에 붙잡혀 긴 옥살이를 했다.
장건은 탐험가로 서역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무제가 파견한 외교 사절이었다. 무제는 당시만 해도 시도 때도 없이 중국을 괴롭혔던 흉노족을 무찌르기 위해 서쪽의 월지국과 군사 동맹을 맺기를 원했는데 장건이 그 사절단장으로 파견된 것이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흉노족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북방의 흉노족은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전투 기술로 볼 수 있는 기마술을 익혀 자주 중국을 침범했다.
이 때문에 무력을 앞세워 중국 대륙을 통일했던 진시황조차도 흉노족을 물리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의 역작인 만리장성은 이처럼 기회 있을 때 마다 중국을 침략하는 흉노족을 막기 위해 세운 것이다. 한 고조 역시 흉노족을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여러 번 일으켰지만 이들을 소탕하지 못했고 한 때는 이들과 싸우다가 오히려 자신의 목숨까지 잃을 뻔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나라에서는 이들에게 황족의 딸을 시집보내고 온갖 선물을 보내는 등 이들을 달래면서 전전 긍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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