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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여행기)
돈황-교역과 여흥문화가 발달했던 도시
기사입력: 2009/01/22 [19:31]   울산여성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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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운편집이사
 
서역으로 가는 장사꾼들이 긴 여행을 위해 여정을 챙겼고 서역에서 들어 온 상인들이 긴 여행 끝에 쉬기도 했던 돈황은 물류교류가 잘 이루어졌고 이에 따른 여흥 문화도 발달했던 곳이다.

과거의 이런 역사를 보여주듯 돈황 중심부에는 ‘비파를 켜는 처녀상’이 서 있다. 도심 로터리에는 신이 나서 한발을 치켜들고 머리 뒤로 비파를 돌려놓고 켜대는 처녀의 모습을 발견 할 수 있다. 비록 동상이지만 대단히 발랄하고 활기찬 처녀의 모습이다.

돈황 주민은 현재 18만 여명이다. 이중 대부분이 한족이고 화족, 티베트족, 위구르족 등 소수민족은 1% 정도다. 돈황에서 오아시스 면적은 전체 면적의 4.5% 정도다. 그러나 지렌산에서 발원한 물이 400여 킬로미터의 먼 길을 달려와 돈황을 관통하기 때문에 물이 풍부하다. 여기에다 땅에서 품어내는 샘물까지 풍부해 도심 전체가 녹색을 이루고 있다. 이 때문에 도심에는 항상 물이 흘러넘치고 있다.

주위에는 물론이고 도심에도 과일과 면화 밭이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특히 도심에는 토질이 좋지 않은 곳에서 잘 자란다는 면화 밭이 많아 늦가을 이면 어디를 가도 하얀 꽃이 핀 면화를 볼 수 있다.

돈황이 활기를 띠는 이유 중의 하나가 요즘 들어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많기 때문이다. 중국의 주요도시들을 연결하는 공항과 기차역에는 매일 수 천명의 교통 인구가 북적거린다.

돈황의 역사는 기원 전 2세기 한무제가 흉노족을 정복하고 하서군의 하나로 돈황군을 두면서 시작된다. 이 때 한 무제는 중국 대륙의 한인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서역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이때부터 돈황은 북과 남을 지나는 거점 도시로서 실크로드의 요충지가 되었다. 특히 중국으로 보면 이 지역은 서방과 변방 지역이 되어 한인․페르시아인, 투르크인․인도인등 여러 종족이 함께 어울려 사는 국제도시가 되었다.  

돈황의 4세기 중엽이 되면 실크로드의 중요도시가 된다. 이 때 불교가 융성하면서 천불동으로 불리는 유명한 막고굴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전진의 승려 낙준에 의해 시작된 막고굴 조성은 이후 북위․서위․북주․수․당․송․원에 이르기 까지 지속되었다. 

현장법사에 앞서 서역탐험에 나섰던 장건이 죽을 고비를 넘겼던 곳도 돈황이다. 서안을 출발했던 그는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 일행이 길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누군가가 ‘물이다’ 하면서 외쳤는데 그 때 장건 일행이 보았던 물이 있었던 곳이 바로 돈황이었다. 

돈황의 전성기는 세기부터 8세기였다. 이때는 당나라 시대로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양의 교역이 정점을 이루었다. 이에 따라 동서무역의 중계지점으로 돈황이 번창했고 그에 따른 문화예술이 꽃피게 되었다. 오늘날 전 세계 관광객들이 찾는 돈황 예술이 꽃핀 것도 이 무렵이다.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돌아오다 이곳에 머물렀던 때 도 이 무렵이다. 연도로 보면 현장법사가 서역 여행을 끝내고 이곳에 머물렀던 시기가 645년이다. 이후 그는 이곳에서 출발 서안으로 들어가 당태종의 영접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돈황은 여러 번 주인이 바뀌는 등 어려움을 겪게 된다. 돈황은 한족의 국가인 서량시대에 최고의 정점을 맞게 된다. 이 때 서량은 돈황을 국도로 삼았다. 그러나 서량이 멸망한 후 돈황은 북량과 북위의 지배를 거쳐 수와 당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후 실크로드는 북로가 개발되어 남로 보다 북로의 중요성이 더해 가자 돈황은 번영을 북동쪽 도시 상락현에게 빼앗겼다.

이때가 되면 돈황은 교역 보다 서역 방어 기점으로서의 역할이 중요시 된다. 특히 당 나라 시대가 되면  이곳에 병력을 주둔시킴으로 방어기지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8세기에 들어서면 돈황은 토번에 점령당하는 비운을 맞기도 한다. 이후 한 때 독립해 금산국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11세기 초 다시 서하의 지배아래 들어 간 뒤부터 돈황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후 원대에는 사주로의 치소가 되고 명대에는 벽지로 남게 되었다. 벽지로 사람들의 왕래가 뜸해 지면서 막고굴을 비롯해 과거 융성했던 불교문화가 잊혀져 갔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막고굴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진 것도 이 무렵이다.

따라서 청조말 영국 고고학자 스타인이 돈황 막고굴을 찾았을 때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찾기가 어려웠고 라마승 몇 명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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