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실크로드여행기)
돈황은 실크로드의 하이라이트
기사입력: 2009/01/15 [17:13]   울산여성뉴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장성운편집이사

돈황은 실크로드의 하이라이트다. 돈황은 우선 지리적으로 서역 남북로가 만나고 갈라지는 교차점이기 때문에 육로를 이용할 경우 서역으로 나가거나 혹은 서역에서 중국으로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했던 지점이다.
이곳에서 갈라진 실크로드는 서쪽으로 1000km 이상 떨어진 카슈가르에서 다시 합쳐진다. 따라서 옛날 중국에서 실크로드 장정에 나섰던 사람들은 반드시 이곳에서 캐러밴을 풀고 다시 짐을 챙겼다.
이런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중국학자들은 돈황을 사람의 목에 비유하곤 했다. 모든 음식물이 목을 통해 인체로 들어가듯 동방문화가 돈황을 거쳐 서역으로 갔고 또 서역의 문물이 돈황을 빠져나와 중국으로 전해졌다. 
돈황은 또 실크로드에서는 가장 값진 유적이 많은 곳이다. 국가의 보호를 받는 보물만도 59곳이나 있고 명사산과 월아천은 중국 전국 40대 관광명승지의 하나로 손꼽힌다. 돈황의 명승 유적지 중 가장 빼어난 것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막고굴이다. 막고굴은 보면 볼수록 그 예술성이 뛰어나고 그 오묘함과 신비의 세계에 매혹된다.
따라서 돈황은 ‘동서문화의 보고’니 혹은 ‘사막의 대화랑’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것은 그만큼 돈황이 문명교류사적으로 볼 때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지정학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 이처럼 중요한 돈황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이곳으로 가는 비행로가 최근 열렸지만 9월이 되면 이미 비수기가 되어 항로가 없다. 실제로 실크로드에 있는 관광지는 9월이 되면 이처럼 찾는 사람들이 적다보니 대부분 문을 닫는다. 또 북경에서 이곳으로 가는 비행기도 하루 일회가 있지만 기체가 작아 승객을 많이 태우지 못한다. 따라서 돈황을 찾는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우루무치로 가 그곳에서 기차를 이용 돈황으로 오게 된다.
그런데 우루무치에서 돈황으로 오는 길도 쉽지 않다. 우루무치에서 돈황으로 오기위해서는 밤새 기차를 타야한다. 중국에서 기차 여행은 승객들이 너무 많아 힘이 든다. 역에 나가 보면 사람들이 너무 많고 이러다 보니 질서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트루판 역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일행은 어렵사리 침대차를 구해 기차를 기다릴 때도 특등 대기실을 이용했지만 밀려드는 인파 때문에 우리들이 기다린 대기실이 특등실이었는지 삼등실이었는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침대 열차가 그나마 깨끗하고 조용했다는 것이다. 중국을 여행하다 보면 침대열차라 하더라도 상대를 잘못 만나면 밤새 시끄러워 잠을 설쳐야 할 때가 많다.
 더욱이 우루무치에서 돈황으로 오는 열차가 없다. 이 때문에 돈황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홍유안 역에 내려서 이곳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3~4시간을 가야 돈황에 도착하게 된다. 우루무치에서 돈황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밤새도록 열차로 달려야 한다. 
 홍유한 역에서 돈황까지 가는 길은 대부분 사막지대다. 따라서 찻길은 일직선으로 잘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낮밤의 기온차가 심하다 보니 찻길이 온전하지 못하다.  이곳 사막의 경우 낮에는 기온이 60도가 넘지만 밤에는 영하 28도까지 내려간다.
이러다 보니 낮의 높은 기온 때문에 아스팔트가 녹아 내려 노면이 울퉁불퉁해 이 위로 달리는 차가 크게 흔들린다. 이 때문에 승객들 중에는 멀미로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곳 역시 사막의 흙들이 모두 뜨거운 태양열에 타버렸는지 시커멓다. 그런데  이 흑암이 대부분 금광이라고 한다. 찻길 옆으로는 자그마한 흙더미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들 역시 단순한 흙덩이가 아니고 소금덩어리라고 한다.
돈황이 가까워지면 곳곳에 작은 마을 들이 많이 나타난다. 마을이 있는 곳은 대부분 오아시스로 밭이 많다. 밭에는 면화가 심어져 있는데 면화의 하얀 솜들이 흡사 눈을 덮어 놓은 것 같다.
길에는 면화를 실은 차들과 경운기가 많이 지나간다.  실제로 돈황은 깐수성의 최대 면화산지다. 실크로드는 아마 돈황의 면화에서 나온 말인 것 같다. 이렇게 보면 이 길 위로 면화를 중심으로 한 문화의 교류가 이미 1000년 전에 이루어졌지만 옛날의 모습은 그대로 남아 있다.
‘크게 번성한다’는 뜻을 갖고 있는 돈황은 깐수성과 칭하이성, 신장성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로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다. 춘추 전국시대에는 수박과 참외 같은 과일이 많이 난다고 해 ‘과주’로 불리었고 진나라와 전한 초에는 이 땅을 흉노족이 차지하기도 했다.
돈황은 또 전략적 요충지로 한 무제는 기원전 111년 이곳에 첫 번째 군(郡)을 설치하고 성을 쌓게 했다. 돈황은 2천 년 전부터 순례자들이 쉬어가는 장소로 사람들이 북적되었다.  
  
      
  • 도배방지 이미지

이동
메인사진
[임영석 시인의 금주의 '詩'] 눅눅한 습성 / 최명선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 썸네일
인기기사 목록